[기고칼럼] 원숭이 꽃신과 대통령의 선언
[기고칼럼] 원숭이 꽃신과 대통령의 선언
  • 신아일보
  • 승인 2017.05.21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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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윤조 공공비정규직노동조합 사무처장
 

어느날 원숭이에게 오소리가 꽃신을 만들어 준다. 원숭이는 처음엔 경계하지만 공짜라는 말에 넙죽넙죽 받아 신다가 꽃신에 길들여지고 말았다. 봄이 되자 원숭이의 발은 보드라워져서 맨발로 다닐 수가 없었다. 오소리에게 잣 다섯 개를 주고 꽃신을 산다. 여름 무렵에는 잣 열 개, 다시 겨울이 되었을 때는 잣 100개를 줘야 꽃신을 살 수 있었다. 이듬해에는 꽃신 값을 감당할 수 없어서 오소리의 종이 되어 오소리를 업고 개울을 건너며 한숨을 내쉰다.(정휘창 동화 ‘원숭이 꽃신’ 中)

문재인 대통령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선언’에 많은 사람들이 지지를 보내고, 비정규직 현장은 기대감에 들썩인다. 공공비정규직노동자의 근로조건 개선과 정규직화를 위해 일해 온 나는 문 대통령의 이 선언이 꼭 성공하기를 바라면서도 이런저런 걱정이 들 수밖에 없다.

정규직화의 허울아래 실질적인 처우개선이 없거나 오히려 직접고용의 대가로 정년이나 임금을 깎으려 들지 않을까, 무기계약직의 차별개선은 또 뒷전으로 밀리지 않을까? 등등.

간접고용을 직접고용으로 전환하는 것만으로 ‘정규직화’라고 거침없이 일컫는 것에서, 또 비정규직 당사자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해 공론화 할 협의구조도 없이 여론몰이로 밀어붙이는 것에서 그러한 기운을 느낀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무엇보다 무늬만 정규직 말고 ‘진짜 정규직’을 기대하고 요구하는 데 대해, 사용자는 물론이고 일부 정규직의 반대 목소리가 가슴 아프다. 어느 보수적인 지역의 보수적 연령대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하면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다”는 말들도 하는 모양이다. 살림살이가 어려우니 그럴만도 하다.

그러나 원숭이가 오소리 꽃신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그 부드러운 발이 다시 단련돼야 한다.

기업을 경영하고, 정부가 공무를 수행하는 데 비정규직이라는 꽃신을 안 신어도 어려움이 없는 사회로 나아가려면 당분간은 기업도, 정부도, 살만한 정규직도 발에 자그마한 생채기는 견디어 내야 한다.

그렇다고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지금 당장 모든 차별을 일시에 다 해소하자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불합리한 차별은 없애되 합리성을 갖춘 차이는 비정규직도 당분간 감수하면서 장차 비정규제도를 없애는 방향으로 가자는 것이다.

적폐청산의 국민명령을 받은 대통령이 첫 과제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당연하고도 올바른 선택이다. 그러나 이 기회는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단 한 번의 기회일지 모른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IMF의 강요로 도입된 비정규직 제도가 20년 동안 최대의 사회적폐로 자리잡은 이후 처음 맞는 기회다. 이번마저 “떡 하나 줄게” 하는 정책으로 그쳐선 안 된다. 근본적으로 비정규제도를 없애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우리 부모세대가 내 자식만은 가난의 설움에서 벗어나라고 부서져라 일만 하느라 손도 못써보고 물려준 비정규직 사회를, 우리가 자식들에게 또 고스란히 대물림하고 “너만은 정규직이 돼라”고 할 것인가?

세금 오를까 걱정하는 것도 이해되고, 남들보다 고생해서 얻은 정규직인데 남들보다 좋은 대우를 받고 싶은 것도 당연하다. 그렇지만 다음세대에까지 비정규직을 물려주진 말자. 20년 만에 잡은 기회인데 공공부문조차 ‘진짜 정규직화’에 실패한다면, 우리사회는 한 발도 정규직화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름만 바꾼 또다른 비정규직으로 내 자식이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새 정부에 분명히 말하자. 지금 하지 않으면 우리 자식들이 영원히 오소리 꽃신의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 

/노윤조 공공비정규직노동조합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