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정부 출범] 대권 재수 끝 청와대 입성… 문재인이 걸어온 길
[文정부 출범] 대권 재수 끝 청와대 입성… 문재인이 걸어온 길
  • 김가애 기자
  • 승인 2017.05.10 01: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盧친구서 '운명처럼' 대통령으로… '민주화 운동'으로 두 번 감옥생활도

▲ 문재인 대통령 당선인이 9일 밤 서울 세종로공원에서 열린 시민들과 함께하는 개표방송에서 활짝 웃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문재인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당선인의 인생은 그의 자서전과 같이 '운명'과도 같다.

문 당선인은 고(故) 노무현 전 당선인을 만나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고 '정권 2인자'에 올랐다.

하지만 정치와는 한사코 담을 쌓아왔던 그가 권력의 최정점에 오른 것은 역설에 가깝다.

학생운동 탓에 판사 임용이 좌절돼 변호사의 길로 들어선 것, 홀로 계신 노모를 모시러 부산행을 택했다가 노 전 대통령을 만난 것,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정치에 입문하며 두 차례 대권에 도전한 것도 모두 운명과 다름 없었다.

노 전 대통령 밑에서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을 지내면서 '폐족 친노'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진 채 '자의 반 타의 반' 현실정치에 발을 들였지만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석패했다.

그가 '정치 신인'의 티를 벗으며 와신상담한 건 이때부터다. 친노(친노무현)에 이어 친문(친문재인) 패권주의라는 프레임이 끝없이 괴롭혔지만, 그는 오로지 국민만 바라봤다.

제1야당 대표를 거치며 분당(分黨) 사태로 무너지던 당을 재건해 작년 4·13 총선 승리를 이끈 그는 두 번째 본선에서 대권을 거머쥐었다.

◇ 거제서 태어나 부산서 자란 文

문재인 당선인은 1953년 1월24일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다. 거제는 6·25전쟁 때 그의 부모가 피란을 와 정착한 마을이었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 부산의 대표적인 달동네였던 영도로 이사했다. 성당에서 나눠주던 구호물자를 받으려 양동이를 들고 긴 줄을 서야 했던 가난은 여전했다. 모친의 연탄배달일을 돕다 리어카 채로 길가에 처박힌 일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는 “가난을 통해 누구보다 서민의 아픔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이후 문 당선인은 부산 최고 명문인 경남중과 경남고를 다녔다. 사춘기 시절엔 독서에 빠져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고교시절엔 운동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고 문학도와도 우정을 쌓았다.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다.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그 시절 별명은 ‘문제아’였다. 그런데도 성적은 좋았다.

문 당선인은 서울대 상대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후 재수 끝에 1972년 경희대 법학과에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 민주화운동으로 두 번의 감옥 생활

대학생 문재인은 '반유신'운동권이었다. 1974년 유신반대 학내시위를 주동하다 체포돼 구류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이듬해인 1975년 인혁당 사건 관계자 사형에 항의하는 대규모 학내시위를 주도하다 구속됐다.

그해 석방과 동시에 강제징집돼 특전사에서 군 생활을 했다. 당시 특전사 여단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 대대장이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었다.

문 당선인은 폭파과정과 화생방 최우수 표창을 받을 정도로 특A급 사병이었다. 상병 때는 북한이 일으킨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대응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1978년 제대 직후 부친을 잃은 회한으로 전남 해남 대흥사에서 고시공부에 매달려 1979년 사시 1차에 합격했다.

1980년 학교로 돌아온 문 당선인은 사시 2차를 치르고 경희대 복학생 대표로 '서울의 봄' 한가운데에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어 또다시 구속되고 만다.

그해 5월 서울역 앞 시위에서 발생한 경찰 사망사건 참고인으로 조사받느라 미결수로 경찰서 유치장 생활을 하던 중 사시 합격 소식을 들었다. 차석이었다.

당시 경찰서장은 축하차 면회를 온 학생처장과 법대 동창회장을 유치장 안으로 들여보내 조촐한 소주 파티를 허가하기도 했다. 경찰 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 연수원 '차석'… 盧와 운명적 만남

문 당선인은 사시 합격으로 난생처음 '평탄한 길'로 들어섰다. 고 조영래 변호사·박원순 서울시장·박시환 대법관·송두환 헌법재판관·고승덕 변호사 등 쟁쟁한 동기들이 즐비했지만,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했다.

판사를 지망했지만 시위전력으로 좌절됐다.

대형로펌 스카우트를 거절하고 부산행을 택했다. 1982년 노 전 대통령과 운명적 만남의 시작이었다.

‘깨끗한 변호사’가 되기로 의기투합 한 두 사람은 친구처럼 함께 일하며 신뢰를 쌓았다. 각종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맡으면서 두 사람은 자연스레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됐고 재야운동에도 발을 들여놓게 됐다.

1988년 노 전 대통령은 13대 총선에 출마해 정치권에 들어섰지만 문 당선인은 노동문제 변호사 길을 걸었다.

노 전 대통령이 당선된 2002년 대선 경선 때 문 당선인이 당시 노 후보의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으며 두 사람은 재결합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생전 문 당선인을 '친구'라고 불렀다. 2002년 대선 후보 당시 연설에서는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친구를 보라고 했다"며 "제가 아주 존경하는 믿음직한 친구, 문재인을 친구로 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 참여정부 시작과 끝 함께한 文

문 당선인은 참여정부의 시작과 끝을 함께했다. 민정수석 두 차례, 시민사회수석, 대통령 비서실장을 거쳤다.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국정 전반을 보좌하다보니 청와대 생활 1년 만에 격무로 이가 10개나 빠졌다. 문 당선인은 지금도 가장 콤플렉스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치아”를 꼽는다.

문 당선인은 업무시간 외에 직접 차를 몰고 비행기나 기차는 늘 일반석을 이용하는 등 관행화된 특혜를 철저히 내려놓았다.

과로에다 당의 총선 출마 요구를 거절한 데 대한 불편함이 커지자 민정수석을 1년도 못하고 물러났다. 하지만 휴식은 길지 않았다.

히말라야 트래킹에서 노 대통령 탄핵 소식에 중도 귀국해 변호인단을 꾸렸다.

탄핵심판 기각 후 시민사회수석으로 복귀했다가 민정수석으로 옮겼다. 2007년 비서실장을 맡으며 '동지 노무현'과 흥망성쇠를 같이 했다.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김해 봉하마을로 가면서 문 당선인은 인근 양산에 거처를 마련했다.

하지만 이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강도 높게 진행됐고 결국 노 전 대통령은 서거했다.

노 전 대통령의 장례 과정에서 상주 문 당선인이 보여준 절제력과 의연함은 국민에게 각인됐고 새로운 정치인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지 않았다면 정치인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것"이라며 정치를 시작한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 대권도전 재수 끝에 청와대 재입성

노 전 대통령 서거 후인 2009년 문 당선인은 경남 양산 국회의원 재보선과 이듬해 부산시장 후보로 거론됐지만 문 당선인은 여전히 현실정치와 선을 그었다. 하지만 그를 향한 정치참여 압박은 거셌다.

결국 정권교체라는 대의명분 속에서 야권 대통합 과정에 뛰어든 문 당선인은 2012년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서 당선됐고, 그 두 달 뒤 대선후보로 나섰다.

이후 안철수·심상정 후보와 단일화를 이뤄내며 야권 단일 후보가 됐지만 대선에서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당시 득표수 1469만표와 48.02%는 야권 대선후보 역대 최고 수치였다.

이후 그는 2014년 당 대표 출마를 선언했다. 실패하면 정치적 사망선고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가 10개월간 당 대표직을 맡는 동안 재·보선 패배, 안철수 전 대표의 탈당, 국민의당으로 분열 등 사퇴요구가 빗발쳤다.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 대표를 영입하며 작년 4·13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대선을 차분히 준비하던 지난해 하반기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이 드러나고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과 헌법재판소의 해임 판결이 이어지면서 촛불민심과 함께했던 문 당선인이 적폐 청산의 최적임자로 부상했다.

2008년 2월25일 정권 2인자로 청와대 문을 쓸쓸히 나섰던 문재인 당선인은 9년2개월여 만에 1인자로 청와대에 복귀하게 됐다.

[신아일보] 김가애 기자 gakim@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