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19대 국회 마지막까지 거수기 역할
[칼럼] 19대 국회 마지막까지 거수기 역할
  • 신아일보
  • 승인 2016.03.03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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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군 부국장

정의화 국회의장이 지난달 초 본회의에서 “그동안 본회의 참석 여부를 당론으로 결정해오면서 국회의원 스스로가 정당 거수기 역할을 자임해온 것 아닌지 성찰해야 한다”고 정당과 의원들의 자성을 촉구했다.

국회의원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적인 헌법 기관으로서 법안을 충실히 심의하고 의결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당 지도부에 의한 주고받기 식의 ‘거래형 정치’는 일상이 돼가고 있다. 이익 챙기기라는 비판도 받고 있는 우리 의회민주주의의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의사 결정을 이해관계를 떠나 자신의 정치적 철학이나 소신으로 스스로 결정하기를 바라면서 선진국회가 되기를 기원하는 발언이었지만 국회의원들의 거수기 논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지난 70여 년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같은 장기 권력을 잡고 국회해산을 밥 먹듯이 하며 국회의원들을 거수기로 만들었다.

거수기란 대통령이나 정당이 시키는 대로 국회에서 손을 드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자기의 주견이나 소견이 없으니까 사람이 아니라 기계라는 뜻이다.

누가 20만 명에 한 사람 꼴로 태어나는 이 나라의 동량을 이렇게 미천한 사람들로 만들었는가?

첫 번째로 이승만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들을 거수기로 만들었다.

사실 대한민국 국회는 처음에는 민주주의의 전당이요 강력한 국회였다. 1952년 이 대통령이 발췌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국회는 반대 143, 찬성 14, 기권 1로 부결시켰다.

그러자 계엄령을 선포하고 야당 의원들을 간첩이라 억류하면서 야바위로 개헌안을 선포했다. 그리고 계속 국회를 유린하면서 장기 집권의 길을 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훌륭한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퇴출당하면서 국회는 거수기들이 장악하기 시작했다. 거수기는 자유당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 후보에게 가까스로 이기고 간신히 대통령이 되자 다시 유신헌법을 선포하면서 집권 연장을 시도했다.

이런 과정에서 1971년 9월30일 여당 내에서 항명파동이 일어나자 이를 주도했던 김성곤, 김진만, 길재호 등 당시 여당의 4인방과 20여명의 국회의원을 억압했다.

물론 김영삼 김대중 선생 등이 저항했으나 지역감정을 일으켜 국회의원들을 거수기로 만들어서 선거 때마다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하니 국회의원이 무슨 수로 거수기를 면하겠느냐? 그런 말이다.

세 번째로 전두환 전 대통령이 12.12쿠데타로 집권한 후 또다시 모든 정당과 국회를 해산했다.

장기간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이상해졌다. 지역감정이 뿌리를 내리면서 영남사람들은 정부여당이 공천하면 양아치라도 국회의원에 당선시키는가 하면 호남 사람들은 사기꾼이더라도 야당이 공천하면 국회로 보내는 이상한 국민이 됐다는 것이다. 국민이 아니라 도민으로 전락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역감정 타파를 외치면서 여당의 철옹성인 부산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낙선의 고배를 들기도 했다. 대통령감도 지역감정에 반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역감정의 주모자는 물론 그 희생자요 조연자인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도 모두 세상을 떠났거나 정치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함께 물러났어야 할 지역감정은 아직도 살아있다. 이를 극복하는 것이 우리민족의 최대 과제임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9일간 이어졌던 야권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가 끝나면서 4.13총선을 불과 40여일 앞둔 2일 선거법과 테러방지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와함께 80여개 무쟁점 법안들도 일사불란하게 처리됐다.

19대 국회 역시 마지막까지 거수기 논란에 자유롭지 못하게 생겼다.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4·13총선은 시키는 대로 충성스럽게 거수기 노릇을 할 만한 사람을 지명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