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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이야기] ‘베니스의 상인’과 채무자의 인권
[금융이야기] ‘베니스의 상인’과 채무자의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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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12.28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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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수 기자

 
셰익스피어의 대표작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베니스의 상인’에는 조금 흥미로운 계약이 하나 등장한다.

안토니오가 샤일록에게 돈을 빌리면서 약속한 날까지 채무변제를 하지 못 할 경우 자신의 살 1파운드를 주겠다는 계약이다.

샤일록은 채무변제를 하지 못한 안토니오의 가슴살 1파운드를 요구하고 결국 그 둘은 법정에 서게 되면서 우리가 “살 1파운드를 베가는 대신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말라”는 명판결이 나오게 된다. 채무자의 목숨에 해가 될 수 있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판결이다.

지난 24일 금감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올 한 해 동안 카드사가 실시한 유체동산 압류중 기초수급자나 장애인 등 취약계층에 대한 압류는 6건이라고 한다.

금감원이 취약계층의 유체동산 압류실태에 대한 지속적인 점검과 개선요구를 반복한 결과 2013년 최초 점검 당시 20%에 달하던 취약계층 유체동산 압류비율이 올해는 0.1%까지 감소했다고 한다.

기초수급자 등 취약계층의 기본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금융당국의 배려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문제는 공포의 ‘빨간 딱지’가 채권자들에 의해 악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채무불이행자들은 채권자들에게서 ‘압류(가압류) 예정 통보장’을 수 십장씩 받아 보았을 것이다.

특히나 취약계층들에게 이와 같은 통보장은 저승사자의 초청장과 같은 위력을 발휘한다.

금감원은 카드사의 압류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했다지만 ‘빨간딱지’를 악용하는 채권자는 카드사보다는 저축은행과 대부업체 등 고금리 대출을 일삼는 채권자들이다.

그들은 압류를 할 의사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채무자의 공포감과 수치심 등을 자극해 채권회수율을 높이고자 ‘빨간딱지 예정통보’를 남발한다.

또 법에 대해 문외한인 채무자들은 ‘빨간딱지’의 두려움 때문에 심한 경우 자발적으로 이 세상을 등지기도 한다.

기초수급자 등 소외계층이란 자신만의 힘으로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이기 때문에 국가의 도움으로 인간의 기본권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법령으로 보호를 해 주도록 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TV, 냉장고, 세탁기 등 가재도구들을 내다 판다고 해도 강제집행을 위한 법률비용에도 미치지 못 할 금액이 나오기 때문에 채권자들은 실제 강제집행을 실행하지 않는다. 다만 ‘빨간딱지’를 붙이겠다고 겁박만 할 뿐이다.

‘빨간딱지’와 함께 악용되는 것이 ‘재산명시 신청’이다. 채무자가 법원에 출두해 자신의 재산목록을 신고하도록 하는 것인데 이 역시 법에 대해 문외한인 채무자들에게는 저승사자의 초청장이다.

신고할 재산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법원에 출두해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심리적인 압박은 극에 달한다.

채권자들이 채무자들의 이런 심리를 악용해 채권을 회수하는 반인륜적 행위를 일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관련 법률은 채무자에게 인색하다. 도덕적 해이를 조장할 수 있다는 논리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민사집행법은 지난 10여년간 급여나(150만원 이하)나 임대차 보증금(주택임대차보호법상 우선변제를 받을 수 있는 금액) 등에 대해서는 채무자의 기본적인 생존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많이 개선됐지만 유체동산에 대한 규정은 처음 제정된 60년대 초반의 전 근대적인 규정이라서 현실과는 많이 동떨어져 있다.

민사집행법의 유체동산 압류 규정을 현실화하고 채권추심 관련 법률도 채무자 우호적으로 개정해 채무자로 하여금 평온한 생활을 유지하며 채무변제를 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줘야 한다는 지적은 10여 년 전부터 꾸준히 지적돼 온 사안이다.

‘베니스의 상인’이 출간된 지 400년이 지났다. 기자는 우리나라가 400년 전 영국보다 인권 후진국이라 생각하지는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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