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 손끝에서 피어나는 화려한 쇠뿔 예술
장인 손끝에서 피어나는 화려한 쇠뿔 예술
  • 온라인뉴스팀
  • 승인 2015.11.16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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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와 감각으로 장애 극복한 화각장 이재만 장인
 

“화각장이 너를 통해 꼭 이어졌으면 좋겠다.”

화각장(華角匠) 이재만 장인은 돈도 안 되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화각공예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

때마다 그를 지켜준 것은 ‘눈과 비 오더라도 한자리서 변치 마라’는 뜻을 담아 ‘원석’(元石)이란 아호를 지어준 스승의 유언이었다. 쇠뿔 살 돈이 없어서 작업을 못할 때도 있었다.

제자 10여명이 입문했으나 모두 도중에 포기했고 목공 솜씨가 좋은 큰아들과 그림 실력이 뛰어난 작은아들만이 제자가 되어 전수를 받고 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 성행했던 화각공예는 쇠뿔을 얇게 펴 종이처럼 만들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려 화려한 색감을 입히는 우리나라 고유의 각질공예이다.

재료도 귀하고 공정도 까다로운 화각은 귀족이나 왕실의 애장품에 주로 이용했다. 사용자가 숨지면 소장품을 같이 묻어주는데 유기물인 쇠뿔은 썩어 없어지기 때문에 전해 내려오는 유물이 거의 없다.

그나마 남아 있는 유물들도 일본 쪽으로 넘어가 있는 게 많다.

이재만 화각장은 “화각은 재료도 귀하고 공정이 까다롭지만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복잡한 아름다운 예술”이라며 “우리나라에서 창안된 독창적인 화각은 세계에서도 인정을 받는 독특한 공예품”이라고 말한다.

인내와 감각으로 손가락 장애 극복한 인간문화재

이재만 화각장은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기어다닐 무렵 화롯불을 잘못 짚어 큰 화상을 입은 후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왼손은 다 눌어붙어버리고 오른손은 엄지와 약지만 남았다.

그러나 선대의 예술적 기질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그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단청장이었고 아버지는 대목장이었으며, 어머니는 자수와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그림 솜씨가 뛰어나 초등학교 시절 전국미술실기대회에서 여러 차례 입상했다. 하지만 만화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만화가의 작업실에서 실습생으로 만화를 그릴 정도로 솜씨가 남달랐다.

만화가를 꿈꿨던 그는 신문배달을 하던 친구로 인해 운명적으로 음일천 선생(1885~1972)을 만난다.

스승은 조선왕실의 화각을 도맡아 제작하던 화각의 명장이었다.

애초에 전통공예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그는 제작과정이 복잡하고 고리타분해 작업장을 뛰쳐나왔다.

서울 을지로 국도극장에서 간판도 그렸고, 분장사와 상업디자인 등 돈 되는 일은 다 해보았지만 배고픔의 연속이었고 끝없는 좌절과 절망만 남았다.

운명인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음일천 선생을 시봉하기 위해 갔다. 다시 안긴 스승의 품 안은 가장 편안했다.

이십대 초반, 당시 오지였던 서울 하일동 공방으로 거처를 옮기고 스승의 잔심부름, 밥 짓기를 해가며 10여 년을 함께 생활했다.

그는 이때 소목, 장식, 옻칠, 채색, 가공 등 전반적인 공예기술을 모두 터득했다.

각고의 노력으로 1974년 동아 공예대전에서 입상했고, 이후 화각공예 맥을 잇는데 매진해 1996년 12월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09호 화각장으로 지정됐다.

온전치 않은 그의 손끝을 거친 쇠뿔은 삼층장·문갑탁자·화장대·봉채함·보석함·팔각찻상·교자상·사주함·반짇고리 등 다양한 공예품으로 탄생했고, 미국·프랑스·독일·중국·일본 등지에서 수십 차례 전시됐다. 작업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의 손을 두고 ‘신의 손’이라 부른다.

“정부의 지원책과 장인의 사명감 필요”

이재만 화각장은 전통공예품의 현대적인 변용에도 관심이 많다.

외국에서 열리는 문화상품 박람회에도 열심히 참가했고 스스로 화각장으로 독립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고가의 예술작품뿐만 아니라 필통·향수병·명함갑·손거울·봉투칼·줄타이 등의 작은 소품도 제작했다.

2002년 월드컵 때, 2개월 기간을 두고 정부로부터 의뢰받은 각국 기자단 기념품 700개를 제작했다.

88서울올림픽 때도 각국 주요 인사들에게 이 장인의 명품이 제공됐다.

전통공예로 문화상품 개발을 성사시킨 공로가 인정돼 ‘신지식인’으로 선정됐다.

무형문화재를 잇는 일은 녹록지 않다.

이재만 화각장은 40여 년간 늘 새벽 4시면 일어나서 작업실에서 새로운 도안을 창안했다.

또 사비를 들여 일본이나 프랑스로 넘어가 있는 화각공예품을 찾아내 재현하고 있다.

이재만 화각장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천 문학동에 위치한 인천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의 화각공방에서 ‘공예 체험 교실’을 운영하고 있고, 학교와 단체로 출강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전통공예품 제작 과정을 자주 접하고 직접 만든다면 자연스레 전통공예품을 보는 눈이 높아지고 일찍이 전통공예에 관심을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이재만 화각장은 “재료 구하기도 어렵고 제작에 많은 시간이 소모돼 대중성이 떨어지다 보니 화각을 배워 보겠다는 후학들이 오래 견디질 못하고 떠난다”며 “정부는 장인이 작품에만 온전히 몰두할 수 있도록 생활비 지원은 물론 의료보험 혜택, 전수자 선별적 지원금 지급 등 다양한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현재 정부의 지원금은 전승보조비 180만원이 전부다.

이 땅에서 장인으로 산다는 것은 일이 힘들고 포기하고 싶더라도 끝없는 인내와 전통공예를 잇는다는 사명감 없이는 힘든 길이다.

[신아일보] 온라인뉴스팀 webmaster@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