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투고] 첫사랑, 롯데 그리고 기업위기관리
[독자투고] 첫사랑, 롯데 그리고 기업위기관리
  • 신아일보
  • 승인 2015.08.19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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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범 맥신코리아 대표

 
어릴 적 짝사랑했던 소녀가 있었다. ‘예쁘장하고, 공주처럼 입고, 부잣집 딸에 심지어 공부까지 잘해 부반장도 했던’ 전형적인 짝사랑 대상이었다.

초1부터 줄곧 혼자 짝사랑만 했다. 중2 겨울방학, 소녀를 처음으로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한 달 내내 따라다녔지만 단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그렇게 끝이 났다.

세월이 흘러 대학 새내기가 되어 그녀가 종로의 대형서점에 근무한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한걸음에 달려갔다.

서점에서 일하던 그녀를 만나 이번에는 자신있게 말을 걸었다. 몇 마디 안부인사가 오간 뒤 필자는 약속도 없이 돌아섰다. 첫사랑에 대한 환상은 그렇게 허망하게 깨졌다. 누구나 그렇듯이.

중2 까까머리 시절에 소공동 롯데백화점에 처음 갔다. 충격 그 자체였다. 처음 본 대리석에 화려한 샹들리에와 더불어 ‘움직이는 계단’은 사랑에 빠지기에 충분했다.

방과 후 친구들과 거의 매일 롯데백화점에 갔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갔었다. 롯데호텔, 롯데월드 등 롯데이야기는 국민들에게 첫사랑, 로망처럼 다가왔다.

세월이 흘러 2015년 롯데 ‘왕자의 난’을 통해 롯데의 민낯을 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롯데, 일본기업’과 ‘어눌한 한국어’를 접했다. ‘첫사랑, 롯데’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은 와세다대 화학공학과를 입학한 이과생이었지만, 어릴 적 작가를 꿈꾸는 문학소년이었다.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융합’을 신 총괄회장은 해방도 되기 전에 실천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남다른 문학에 대한 열정과 괴테의 사랑은 후일 기업 브랜드 네이밍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The Sorrows of Young Werther, 1774)’에서 베르테르가 짝사랑한 여주인공 샤르로테 부프(Charlotte Buff)가 있다.

신 총괄회장은 그녀의 애칭 로테의 일본식 발음 ‘롯데(Lotte)’를 기업 이름으로 삼았다.

신격호 총괄회장은 후일 ‘롯데를 선택한 것이야말로 내 일생일대의 수확이자 걸작의 아이디어’라고 얘기했을 정도로 ‘롯데’ 네이밍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실제로 그의 ‘롯데’라는 기업명의 선택은 ‘신의 한 수’였다. 필자에게 일본 기업에서 가장 아름다운 브랜드명 2개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소니(SONY)와 롯데(LOTTE)를 들 것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지난 11일 롯데 경영권 분쟁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기자회견에서 신 회장은 롯데의 불투명한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여론은 싸늘했다. 왜일까? 신 회장의 대국민 사과문은 한 마디로 ‘속 빈 강정’이나 다름없었다.

국민은 ‘첫사랑, 롯데’에 대한 배신감과 상실감으로 분노에 차 있는데, 신 회장은 지엽적인 ‘순환출자 해소’를 얘기한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유학한 필자는 한국에서 만나는 러시아인에게 하는 농담이 있다. “브이 오친 하라쇼 가바리쩨 빠루스키!(러시아어을 참 잘하시네요!)” 그러면 열에 아홉은 깔깔대고 웃으며 얘기한다. ‘러시아인이니까’라고.

다시 말해 러시아어를 잘한다는 표현은 외국인에게나 쓰는 것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대국민 사과문을 접한 한 평론가가 TV에서 “한국말을 잘한다”는 표현을 썼다.

그렇다. 신동빈 회장의 국적은 대한민국일지라도 ‘한국인’이 아닌 것이다. 적어도 언어적인 측면에서 신 회장은 일본인이 맞다.

영화 ‘암살’에서 민족을 왜 배신했느냐는 질문에 염석진은 “이렇게 빨리 해방될 줄 몰랐다”라고 쿨하게 답했다.

신동빈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한국 롯데는 국내 상장 8개 계열사 매출액이 그룹 전체 매출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한국 기업”이라고 말했다.

그런 한국 롯데의 대표인 신 회장이 왜 한국어에 서투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한국 롯데가 이렇게 클지 몰랐다”라고 답할지도 모른다.

기업의 위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회사 책임자의 진솔한 사과에 무마되는 것도 있고, 기업 오너가 법적 책임을 져야 결말이 나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 일정기간이 지나면 용서가 되거나 대중의 기억에 잊혀지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하지만 지금의 롯데의 위기 본질은 바로 ‘첫사랑, 롯데’의 상실이다.

신동빈 회장은 모든 것을 버릴 수도 있다는 이순신 장군의 ‘사즉생(死則生)’ 정신으로 임해야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투(關ケ原,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통일을 완성한 전투)’를 빗대며 임한 일본 롯데홀딩스 주주총회 승리에 도취할 때가 아니다. 

/한승범 맥신코리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