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상에 마모된 해미읍성 학자수, 회화나무
풍상에 마모된 해미읍성 학자수, 회화나무
  • 주장환 순회특파원
  • 승인 2014.08.16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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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밭마을 젊은 아낙 통곡소리 그칠 줄 모르고
관청문을 향해 울부짖다 하늘 보고 호소하네
정벌 나간 남편은 못 돌아오는 수는 있어도
예부터 남자가 생식기를 잘랐단 말 들어 보지 못했네(하략)

-정약용의 시 <애절양(哀絶陽)>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해당화’가 이제 막 피는 해미읍성 안에 서 있는 회화나무(호야나무)는 거룩하고 숭고하며 장엄한 냄새가 난다. 푸르른 잎들이 시나브로 무성하여 하늘색 고운 동녘하늘을 찰지게 만들고 있는 이 나무는 300살이 넘었다.

해미읍성 안에서 사람들은 천 원짜리 지폐 뒷면에 그려진 회화나무를 보면서 신기해했다. 그리고 꽃, 잎, 열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귀한 존재였던 이 나무가 죄인 아닌 죄인 나무라는데 기겁을 했다.

해미 읍성의 감옥에는 한티고개를 넘어 이곳으로 압송되어 온 천주교인들이 득실거렸다. 망건에 탕건 쓴 관리들은 ‘예수쟁이’라 하면 두 눈 질끈 감고 패대기부터 쳤다. 모진 매질에도 곱살거리며 빌지 않으면, 회화나무에 매달아 죽였다.

지금은 나무 중간 매달았던 가지는 부러지고 그 자리에 옹이가 보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옹이 변두리에 녹슨 철사의 흔적이 남아있었다고 하나, 그것마저 풍상에 마모되고 말았다. 그러기에 남의 깊은 상처는 들여다보는 법이 아닌가 보다.

나무도 힘이 들었나 보다. 헤지고 파진 자리에 여러 차례 외과수술을 받은 흔적이 역력하다. 나무의 기상이 학자의 기상처럼 자유롭게 뻗었다고 해서 ‘학자수(學者樹)’라 부르며 잡귀를 물리치는 나무로도 알려져 있는 만큼, 그 아쉬움이 더하다.

교회가 이곳을 순교지로 인식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부의 연장 끝에 걸려들어 버려지던 뼈들이 많았다 하는데, 이 때 캐어내던 뼈들은 바로 서있는 채 발견됐다고 한다. 그것은 죽은 몸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 묻혔다는 증거라는 것이 천주교 학자들의 말이다.

낙화는 슬프다. 눈물 속에 지는 꽃 이파리들에 한이 맺혀 있다. 꽃 한 송이에도 가슴에 물기가 고일 때가 있다. 해미의 꽃은 해마다 봄날이면 새로 피지만 영영 아프다.

해미읍성을 나와 바로 길을 걸으면 한적한 읍 풍경에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 한 5분 걸으면 해미천이 나타난다. 제방을 걸어 10여분 가면 읍내리 해미 순교성지를 만날 수 있다.

박해가 심했던 1797년부터 1866년까지 수천 명이 넘는 무명 순교자가 나온 이 일대는 "예수 마리아!"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로 잘못 알아듣던 곳으로 ‘여숫골’로 불린다.

해미 순교성지 안에는 성인들의 모습은 물론 성모마리아가 슬퍼 보이는 진둠벙이며, 무덤이 통곡하는 순교탑, 그리고 십자가의 길 등이 조성돼 있다. 이곳 지역 첫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가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 천주님께 바치는 거야”라고 한 말을 새긴 돌 조형물은 마음을 눅눅해지게 만든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8월 17일 폐막미사를 해미읍성에서 집전한다. 교황의 폐막미사는 죽음을 택한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송하며 넘던 한티고개에서 자신의 집을 바라보며 떠나온 가족을 그리며 비로소 단장의 한을 풀게 될 것이다.<주장환 순회특파원·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