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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본사자문위원장 정운찬 前 총리가 말하는 스코필드 박사 - 下
(6) 본사자문위원장 정운찬 前 총리가 말하는 스코필드 박사 - 下
  • 주장환
  • 승인 2014.06.25 19: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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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과 제암리 사건의 생생한 기록 후세에 전달

 
■ 3·1운동때 사진 촬영

스코필드 박사가 3.1 운동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리는 사연 또한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잔뜩 묻어있다.

그날은 바로 기미년 3월 1일이었다. 박사는 오후 2시 경, 탑골 공원 먼 언저리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는 카메라가 걸려 있었다. 이윽고 공원 안에서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대한독립 만세!"

스코필드 박사는 재빨리 공원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태극기의 대열은 노도와 같이 공원 정문을 박차고 밀려 나왔다.

그는 태극기와 함성의 대열을 향해 쉴 새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종로 거리 양쪽 가도에 사람들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의기양양하게 대열을 따라가면서 역사적 장면을 촬영했다.

▲ 제암리 현장 사진. 스코필드 박사는 일본군경의 눈을 피해 구금을 무릎쓰고 이 사진을 촬영하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도둑으로 오인받기도 하는데 그 사연이 포복절도할 만큼 재미있으면서도 어쩐지 눈물이 난다. 사연을 들어보자.

<시위대가 진고개 어귀에 다다랐을 때는 용산 쪽에서 급거 출동한 헌병과 기마경찰대가 칼을 빼어 들고 좁은 골목을 수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군도와 경찰도를 휘두르면서 덤벼들었다. 비좁은 길목은 금방 터져 나갈 듯이 북적댔다. 스코필드 박사는 이 광경을 찍기 위해 길가 집 이층에 들어가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 때였다. "도둑놈이얏"하는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렸다. 집 주인인 일본여자였다. 박사는 한국말로 "누님, 누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 사람 도둑놈 아닙니다"라고 변명하면서 계속 사진을 찍어댔다. 그 말에 더욱 화가 치민 이 여자는 방구석에 세워두었던 기다란 일본 빗자루를 잡아 쥐고 스코필드 박사를 마구 밀쳐냈다.>

정 총리가 명에회장으로 있는 (사)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에서 소개하는 내용을 보면 박사는 한국민의 독립 투쟁을 적극 지원하여 일본 총독에게 탄압의 중지를 직접 충고하기도 했었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그는 한때 자유당 독재 정치를 꾸짖기도 했으며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무엇이건 짐작해서 행하는 폐습을 버리고, 핑계해서 책임을 회피하지말라"는 충고를 하기도 했다.

당시 민주당의 내분을 극도로 우려하던 스코필드 박사는 학생들의 4.19의거를 찬송했으며 국내 일간 영자신문 <코리언·리버블릭>에 '5·16 군사혁명에 대한 나의 견해'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글에서 그는 "한국의 현 정세를 잘 파악 검토해 볼 때 누구든지 '5·16 군사혁명은 필요하고도 불가피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민주당 정권의 부정과 무능을 공박하고 군사혁명 전의 한국사회의 부패상을 낱낱이 폭로했다.

특히 그는 한국의 군사혁명을 한국의 앞날의 번영을 위한 '마지막 희망이며 마지막 기회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정총리는 '약자에게는 비둘기 같은 자애로움으로, 강자에게는 호랑이 같은 엄격함으로' 대할 것을 강조한 스코필드 박사의 정신을 소개했다.

"박사님은 항상 정의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면서, 특히 건설적 비판정신을 기르라고 강조했습니다. 1960년대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한국에서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개탄하기도 했죠.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회공동체가 보살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답니다"

정총리는 당시 한국인들은 그를 통해 사회 속에 몸담은 지식인의 길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익히고 배웠다고 회상한다.

▲ 정운찬 전 총리(가운데)가 지난 4월 11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12회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 추모식에서 묵념하고 있다.

최근 간행된 '석호필(이장락 지음/바람 펴냄)'에서는 1919년 4월 15일 아리다 일본 육군중위가 이끄는 한 무리의 일본 군경이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주민을 집단적으로 살해한 만행사건을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스코필드 박사에 의해 이 사건의 사진 자료가 남게 됐고 만천하에 만행이 알려지게 됐는데 '제암리/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에 그 기록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당시 제암리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열차에서 스코필드 박사는 우연히 매국노 이완용을 만난다. 박사는 식당차에 가서 식사를 하려 들어갔다가 이완용과 부딪히게 되는데 박사는 일부러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책 '석호필'에서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스코필드 박사는 그에게 한 마디 하고 싶어졌다. 박사는 노신사에게 가서 인사를 하고, "저는 서울에 와 있는 캐나다 선교사 석호필입니다" 라고 말을 건넸다. 그 노신사는 분명히 "나는 이완용이오"하고 어두운 표정을 지닌 채 응대했다. 스코필드 박사가 미처 다른 말을 하기도 전에 "여보시오, 캐나다 선교사 양반. 내가 예수를 믿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오?"하고 점잖은 목소리로 물었다. 스코필드 박사로서는 의외의 물음을 당한 것이었다. (중략)
그는 천연스럽게, "네, 좋습니다. 이 선생님, 그런데 이 선생님의 경우는 이천만 온 국민 앞에 진심으로 사과를 하셔야만 하느님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응수했다. 이완용의 낯이 더욱 침울해지고 호위경관들의 얼굴이 긴장됐다.>

■ 정총리, 임종 지켜

책에는 또 5월 중순 경 스코필드 박사가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하여 이화 학당의 유관순 열사를 만난 일도 나와 있다.

또 '끌 수 없는 불꽃'이라는 3.1운동 목격기를 들고 이승만 박사를 만난 이야기며 이기붕과의 만남, 그리고 그가 이 땅에 오기까지의 사연, 그리고 한국에 묻히기까지의 이야기들이 잔잔하게 서술돼 있다.

정총리는 어린시절 스코필드 박사로부터 받은 가르침은 1986년 '체육관 선거를 종식하고 국민들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자'는 교수 서명운동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회고한다.

대학로를 스코필드 박사와 함께 산책할 때 "약자에게는 비둘기 같은 자애로움으로 가진 자에게는 호랑이 같은 엄격함으로 살아갈 것을 강조하셨고 가난한 사람들은 사회공동체가 보살펴야 한다고 강조하신 모습이 아련하다"고 말한다.

정총리는 스코필드 박사가 돌아가실 때 병상을 내내 지키며 임종까지 지켜봤는데 마지막에 자신의 손을 잡아 주던 따스한 모습을 아직까지 잊지 못한다고 아파했다.

▲ 지난 2011년 4월 테드 립만 주한캐나다 대사가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스코필드홀에서 열린 제9회 스코필드 박사 추모기념행사에서 유진 (사)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장에게 스코필드 박사의 유품을 전달하고 있다.

한편, 정총리를 비롯한 호랑이 스코필드 기념사업회의 제안에 따라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주변에 석호필 박사 동상 건립이 조만간 진행된다.

박사의 동상은 사적으로 지정된 문화재 구역으로부터 25m 떨어진 10mx8m 부지에 높이 1.5m의 크기로 세워질 예정이다. 화성시와 국가보훈처가 절반씩 부담해 총 3억5000만원의 사업비가 책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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