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죄’로 죽어간 원혼들의 한이 밟히는 눈물의 땅”
“‘믿는 죄’로 죽어간 원혼들의 한이 밟히는 눈물의 땅”
  • 주장환 취재국장
  • 승인 2014.06.24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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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프란치스코 교황 오시는 해미 지역 上

 
‘죄인 나무’로 부르던 회화나무는 거룩하고 숭고하며 장엄

죄가 미워/ 죄짓지 않고 살겠다는데/ 영생하는 게 아니고/ 그게 죽을죄란다/ 그저 예 서 있었을 뿐인데/ 매달아 고문하고 죽였으니 /회화나무가 아니고/ 그게 교수 목이란다/ 죄인 아닌 죄인도 죽고/ 죄인 아닌 죄인 죽인 죄인도 죽고/ 죄인 아닌 죄인나무만 시퍼렇게 살아 있다.(하략)

 -김풍배, <해미읍성 회화나무 존재이유>-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해당화’가 이제 막 피는 해미읍성 안에 서 있는 회화나무(호야나무)는 거룩하고 숭고하며 장엄한 냄새가 난다. 푸르른 잎들이 시나브로 무성하여 하늘색 고운 동녘하늘을 찰지게 만들고 있는 이 나무는 300살이 넘었다.

해미읍성 안에서 사람들은 천 원짜리 지폐 뒷면에 그려진 회화나무를 보면서 신기해했다. 그리고 꽃, 잎, 열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귀한 존재였던 이 나무가 죄인 아닌 죄인 나무라는데 기겁을 했다.

▲ 해미읍성 진남문. 과거의 아픈 기억을 보듬고 있는 이곳은 이제 관광지로서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 회화나무가 흘린 눈물

해미 읍성의 감옥에는 한티고개를 넘어 이곳으로 압송되어 온 천주교인들이 득실거렸다. 망건에 탕건 쓴 관리들은 ‘예수쟁이’라 하면 두 눈 질끈 감고 패대기부터 쳤다. 모진 매질에도 곱살거리며 빌지 않으면, 회화나무에 매달아 죽였다.

지금은 나무 중간 매달았던 가지는 부러지고 그 자리에 옹이가 보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옹이 변두리에 녹슨 철사의 흔적이 남아있었다고 하나, 그것마저 풍상에 마모되고 말았다. 그러기에 남의 깊은 상처는 들여다보는 법이 아닌가 보다.

나무도 힘이 들었나 보다. 헤지고 파진 자리에 여러 차례 외과수술을 받은 흔적이 역력하다. 나무의 기상이 학자의 기상처럼 자유롭게 뻗었다고 해서 ‘학자수(學者樹)’라 부르며 잡귀를 물리치는 나무로도 알려져 있는 만큼, 그 아쉬움이 더하다.

1578년에는 이순신이 이곳에서 병사영의 군관으로 열 달 동안 근무했다. 해미 읍지에는 그 모습을 둘레가 6,630척이며 높이가 13척, 옹성(甕城)이 둘, 우물이 여섯 개 있으며 성 둘레에 탱자나무 울이 둘러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성 밖에서는 탱자나무 울타리를 볼 수 없다.

해미읍성 진남문 옆 성벽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서산시 해미 읍성 방문을 환영합니다’ 하는 커다란 걸개가 걸려있었는데, 교황은 거기서 함빡 웃고 있었다.

해미읍성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관아 앞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와 연록의 나무들이 무성한 벌레소리에 키가 더욱 커져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과거의 아픈 기억을 보듬고 있는 해미 읍성은 차라리 지금처럼 조성되지 않았을 때가 더 아픈 모습을 민낯으로 드러냈던 것 같다. 오래 전 이곳에 우연찮게 들렸을 때에는 그 모습이 정말로 남루했었다. 흑백 사진에서나 만날 수 있는 처연하고 쓸쓸한 정경에 괜히 우울했었다. 성안은 비어서 잡초만 무성했고, 덩그러니 서있는 외톨이 그네며 서걱거리는 대나무 숲에 담쟁이 넝쿨이 목가적 정취를 불러일으켰었다.

이제는 오히려 너무 요란스러워서 그 옛날의 아픔을 되잡지 못할까 걱정이 될 정도로 그저 그런 위락지가 되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심지어 조악하기까지 하고….

사람들은 그저 까르르 즐겁게 논다. 나무 아래서는 재기를 차며 놀고, 형을 집행하던 형틀에서는 모두들 곤장을 치며 추억 만들기에 바쁘다. 억울하게 가슴 치며 죽어간 영혼들의 맺힌 멍우리를 위로하기 위한 기도터라도 만들었으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든다.

홍예를 올려 문을 삼고 그 위에 3칸 2층 누각을 세운 진남문 앞의 길을 따라 성곽을 끼고 돌아 약 400m 가면 서문(정분문)이 나온다. 서문은 순교자들의 생사를 가르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성안의 옥에 수감된 천주교인들 가운데 형이 확정된 사람은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찬 이슬 머금었다.

▲ 죄인들을 꽁꽁 묶어 물속에 빠뜨려 죽이는 생지옥을 만든 진둠벙. 성모 마리아가 아픈 듯 서 계신다.

여기서는 심심하면 매질이요, 분기탱천하면 목 졸라 죽이거나 칼로 내리쳤다. 성질 더러운 포졸한테 걸리면, 곡식을 타작하듯 메어치는 자리개질로 처형당하기도 했다. 돌다리 위에서 죄수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방법이다. 나아가 여러 명을 눕혀 놓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하였는데, 혹시라도 꿈틀거리는 몸뚱이가 있으면 횃불로 눈알을 지져대기도 했다고 한다.

해가 지는 서쪽은 부정한 것을 버리고 삿된 것을 막는 곳이었다고 한다. 서문 밖이 사학죄인의 처형지가 된 것도 이런 연유였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1956년 유물 보존을 위해 서산성당으로 옮겨 갔던 해미읍성 형장 길의 자리개돌을 1986년 8월 29일 본래의 위치로 되돌려 놓으면서 순교지로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들어갔다.

순교 선열들을 군졸들은 매일같이 해미 진영 서문 밖에 끌어내어 교수,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죽였다고 한다.

해미 서녘 들판에서 사람들은 울부짖었다. “어머니, 아버지, 얘야, 내 아들아, 내딸아!” 비명과 울음소리가 천둥을 비껴갔다. 포졸들은 천주교인 수십 명씩 이곳에 데리고 와서 큰 구덩이에 몰아넣고 묻어버렸다.

또한 여름철 죄인의 수가 적을 경우에는, 포졸들이 번거로움을 덜기 위한 방법으로 개울 한가운데에 있던 둠벙에 죄인들을 꽁꽁 묶어 물속에 빠뜨려 죽이는 생지옥을 만들었다. 그래서 나온 둠벙을 죄인 둠벙이라 불렀으며, 지금은 진둠벙이라 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