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칠갑산 모덕사와 천장호 그리고 장곡사
“면암 최익현의 기상과 천장호 품은 칠갑산 정기가 만나는 곳”
(10) 칠갑산 모덕사와 천장호 그리고 장곡사
“면암 최익현의 기상과 천장호 품은 칠갑산 정기가 만나는 곳”
  • 주장환 작가
  • 승인 2014.06.17 17:35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비 ‘일편단심’표상 모덕사 백일홍은 영그는 중
장곡사 가는 길의 ‘산꽃마을 가는 길’은 名 산책길

▲ 한적한 모덕사. 왼편 건물이 중화당이며 백일홍이 앞에 보인다.

면암 최익현을 기리는 모덕사 중화당 왼편에 서서 수백년 풍상을 겪은 백일홍은 아직 영그는 중이었다. 고택 지붕보다 키 큰 고목의 잎은 100일 동안이나 버틴다고 했다. 여름과 가을 중입에 줄기 끝 또는 잎겨드랑이에서 꽃줄기가 나와 빨갛고 노란 꽃대 끝에 꽃이 뭉쳐 붙어 머리 모양을 이룬다. 사람들은 그것을 두상화로 부르는데 탐화꾼이라면 눈에 불꽃이 일게 틀림이 없었다.

백일홍은 선비의 일편단심을 나타낸다 했다. 이 놈은 아무래도 이 집 주인 최익현을 닮은 듯하다. 꼬불하게 몸을 틀었다가 다시 일어서는 모습은 서구를 중심으로 돌던 낡은 천동설을 부인하고 우리 것을 지키려 목숨까지 버린 기개 높은 선비를 연상시킨다.

6월 중순 모덕사는 뙤약볕 아래에서도 우목 저수지에 물을 가득 담고 있었다. 사당 안에 있는 연못은 노랑 산국을 어깨에 드리우고 있었는데 지천이었다. 민들레 몇 그루가 그 틈에서 바람을 기다리며 흔들거리고 영모제 뒷마당에는 살구나무며 오디나무가 키 크게 서서 사람들에게 싱싱한 과육을 내주고 있었다. 여행객들은 오디를 따서 먹곤 입이 잉크빛으로 물든 것도 모르고 ‘호호호’ ‘하하하’ 웃는다.

■ 초상화에 기개 살아

충남 청양군 목면 송암리에 있는 이곳은 36번 국도 공주와 청양을 경계하는 다리에서부터 여우고개 사이의 양 국도변에 자리하고 있다. 최익현이 경기도 포천에서 내려와 기거하던 곳이다. 지금은 후손이 명패를 내걸고 있지만 고색이 바래 오히려 창연(悵然)한 느낌이 더하다.

모덕사 입구에 들어서면 옆면 3칸 앞면 3칸의 주심포식 팔작지붕의 전통 건축물이 의연한데 바로 대의관이다. 이곳은 생전에 최익현이 사용하던 피혁류, 필기구 등 총 9종 128점이 전시돼 있다.

비록 그 형체는 남루하고 어설퍼 보이지만 꼿꼿한 기상은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팔팔하게 살아있는 듯하다.

전라도 순창 의거 시, 왜병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당하는 도중 찍은 사진이 이채롭다. 특히 무슨 이유에선지 안경에 눈이 보이지 않아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이런저런 추측을 했으나 햇빛에 반사돼 그런 것 아닌가 하는 추측이 제일 그럴 듯하다.

최익현의 스승인 이항로가 선생의 나이 14세 때 직접 써서 내린 아호가 친필 현판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선생 생전에 올린 상소를 제자들이 필사한 것을 전시해 놓은 상소문에는 통한이 녹여져 있는데 고종의 밀지는 애통함을 더한다.

이곳 건물은 춘추각 영모제 사당 등 8개로 나눠져 있는데 굴뚝이 외곽에 설치돼 있다. 특히 중화당은 뒤편이 아니라 왼편에 굴뚝이 설치돼 있어서 그 묘한 배치가 궁금증을 자아냈다. 이제는 연기조차 말라 버린 그 굴뚝 아래 흙이 얼핏 비치는 곳에서는 거미가 줄을 만들어 내면서 채집망을 치고 있었다.

안쪽으로 태극무늬가 그려진, 대문이 큰 성충사가 있다. 영당 안에는 최익현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이 것은 1905년 73세의 최익현을 당시 정산현감이었던 채용신이 그린 것으로 일제가 주는 밥이며 약도 마다한 서릿발 같은 기상을 극사실주의적 수법으로 살려내고 있다.

어진 화가 채용신 역시 기개가 남다른 인물이었으니 그의 손에서 표현된 최익현의 성품이야 오죽 잘 표현됐으랴.

채용신은 정산군수의 명을 받아 내려왔는데 최익현을 감시하는 것도 그의 소임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감시하기 보다는 최익현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그를 존경하는 마음을 대신 표현했다.

바람벽이나 치고 가려고 이리 먼 길 달려온 것도 아닌데 싱숭생숭해졌다. 잠시 숙연해져 눈을 감으니 칠갑산 저 어디메쯤에 바람 소리 칼 같이 날카로운 이곳이 충남 청양임을 새삼 안다.

▲ 모덕사에서 묵례를 드리고 있는 관광객들. 이들 마음 속에는 한 시대를 풍미한 기개의 인물 최익현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 구기자·고추마을 “볼 만”

사람들은 청양하면 대뜸 고추를 떠올렸다. 그래서 청양 고추는 청양의 힘이다. 그 힘은 마트나 시장 바닥에서도 잘 나타난다. 원산지와 명칭 유래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지만 청양에서 토종이 된지 오래다.

고추의 매운 맛은 이 지역 꼿꼿한 기개의 표상인 최익현의 기상과 맥을 같이 한다. 1905년 일본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항일의병운동을 펼치다 일본군에 체포돼 대마도(쓰시마섬)에서 운명을 달리한 최익현의 기개는 일제에게 고추같이 매웠던 것이 아닌가 한다.

송암리 뒤편으로 병풍처럼 늘어선 산은 거북이 등과 머리를 닮았다. 그래서 ‘장구동’이라 부른다. 본래 장구동에는 최익현의 집과 함께 다수의 가구가 살고 있었으나, 1984년 우목저수지 공사를 하면서 마을이 물에 잠기게 돼, 주민들은 모두 이웃마을로 이전하였다 한다.

그러나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던 그의 고택은 수몰을 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지금은 마을 전체가 모덕사 경내라는게 사람들 말이다.

윤진평 자유행복학교장은 “면암은 대원군 앞에 멍석을 깔고 도끼로 목을 치라며 상소할 정도로 대쪽같은 성품을 지녔다” 고 평했다. 최익현의 사상은 주리(主理) 철학에 바탕을 두고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을 내세운 화서 이항로의 맥을 잇는다. 이는 구한말 민족사상인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이루면서 반외세 척결운동의 실천이념으로 빛을 발한다.

최익현이 1906년에 쓴 의병 격문을 한 번 보자.

“오호라, 작년(1905년) 10월에 저들이 한 행위는 만고에 일찍이 없던 일로서, 억압으로 한 조각의 종이에 조인하여 500년 전해오던 종묘사직이 드디어 하룻밤 사이에 망하였으니, 임금이 없으면 신하가 어찌 홀로 있을 수 있으며, 나라가 망하면 백성이 어찌 홀로 보존될 수 있겠는가. 나라가 이와 같이 망해 갈진대 어찌 한번 싸우지 않을 수 있는가. 또 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죽어서 충의의 혼이 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한 조각의 종이 조각’ 때문에 500년 사직이 무너지는 황당한 충격을 그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던 것 같다. 1876년 문을 열자 나라는 뒤죽박죽됐다.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동학농민운동(1894), 갑오개혁(1894), 대한제국 선포(1897)와 일련의 의병항쟁으로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때 최익현은 일본과 서양은 같은 족속이라는 왜양일체론으로 문을 걸어 잠궜다.

서툴고 이질적이기만 한 낯선 존재였던 서양인과 서양 문물에 대한 두려움이었는지 아니면 주체적 사상의 발로였는지는 여기서 따질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결국 타율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식민화의 길로 나아간 점에 대해서는 유구무언이다.

모덕사를 나와 칠갑산으로 향하는 길에 목면 구기자 고추 마을에 들러도 좋다. 칠갑산의 지맥인 미궐산이 목면의 진산이며 면내의 최고봉이다. 마을은 아늑하여 고추나 구기자 뿐 아니라 사람살기에도 그만인 듯하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안심리에 있는 마을정보센터. 깔끔하게 단장돼 도시 못지않는 정보화가 이뤄지고 있다.

▲ 천장호 출렁다리. 공사 중이어서 건너지 못했다. 사람들은 인공이 심하면 맛이 떨어진다 했다.

목면 바로 옆이 정산면이다. 이곳에는 용을 품은 천장호가 있다. 유원지 입구로 들어서면 버드나무가 버찌를 품고 반겨준다. 이곳은 오락프로그램 1박 2일의 촬영지라고 커다랗게 자랑해 놓았으나 자랑거리라고 하기엔 좀 낯부끄러워 보인다.

천장호는 조경이 한창이었다. 건너편 산자락엔 용의 모양을 형상화해 놓고 있었는데 주위경관과 어울린다고 보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콩밭 매는 아낙네의 모습이 우리 옛 여인과 닮지 않았다고 소곤거리며 흉을 봤다. 그리고 공원 전체가 인공미가 심하다고 언짢아했다. 이날은 마침 출렁다리를 수리하는 중이어서 건너편으로 건너가지 못했다. 대신 사진만 줄창 박고 호수 가장자리로 몰려든 숭어인지 가물치인지 분간 안 되는 고기들의 몸부림만 눈이 아프도록 봤다. 그래도 신록이 짙어져 가는 숲을 담은 천장호는 제 풀에 지쳐서 나자빠지는 법은 없었다.

칠갑산 장곡사 가는 길에 있는 ‘산꽃마을 가는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645번 지방도다. 이곳은 봄에 와야 제 멋을 느낀다. 벚꽃터널 아래서 사랑하는 이와 함께 걸으면 마음에도 꽃이 들어온다. 그러나 이 계절 버찌 가득한 연두빛 이파리에 취해 보는 것도 만만치 않은 행복이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

어디선가 노래가 흘러왔다.

그 소리에 장단 맞추며 산꽃마을에 발을 디뎠다. 청국장 냄새며 구기자 술 냄새가 이미 사람들을 취하게 한다. 그 아래로는 장승들이 목놓아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 미신을 믿는다고 정부에서 장승을 모조리 없애라 했다. 그러나 이곳은 워낙 깊은 산속이었던 탓에 그 명령이 안 들렸다.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게 지금은 효자 노릇 단단히 한다.

▲ 장승공원에 세워진 전국 최대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나무를 미국과 캐나다에서 수입해 와 아쉬움이 남았다.

■ 탱화 볼수없어 “서운”

장승공원에 세워진 장승은 대략 350~60점 되며 중앙에 세워진 높이 10m의 전국 최대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나무를 수입해 왔다. 말하자면 외산 장승인 셈이다. 문화관광 해설사 류인자씨는 지리산 여장승과 칠갑산 남장승을 지난 5월에 결혼시키려 했으나 세월호 사건으로 미뤄졌다며 아쉬워한다.

장곡사 올라가는 오솔길은 호젓하지 않았다. 절 입구까지 차량이 오가는 바람에 먼지를 덮어썼다. 그러나 길가에 늘어선 은행나무의 푸른 잎이 가을 정서를 앞당겨 자아냈다. 특히 햇빛이 나는 쪽으로만 팔을 뻗듯 가지가 뻗어져 있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또 은행이 떨어져 땅속에서 다시 발아하고 있는 모습에 생명의 환희를 맛본다.

이곳 장곡사에는 가끔 호랑이들이 놀러와 담배를 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호랑이들이 죄다 사라졌는데 그 이유가 폐암에 걸려 모두 죽었기때문이라나 뭐라나…. 아무튼 몸에 해로운 담배는 자근자근 밟는게 오래 사는 방법인 듯하다.

장곡사 앞에 붓으로 일필한 듯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99 굽이를 휘휘 돌아내린다 해서 아흔아홉계곡이라 불린다. 장곡사는 우리나라에서 대웅전을 두 개 가지고 있는 유일한 절로 상대웅전은 건물 자체가 보물162호로 지정돼 있고, 내부의 철조약사여래좌상부석조연화대좌는 국보 58호, 철조비로자나좌상 부석조대좌는 보물 174호로 각각 지정돼 있다.

그리고 왕가의 만수무강을 기원한 높이 9m가 넘는 미륵불괘불탱이 해마다 사람들을 찾았는데 보존 문제로 이제는 구경할 수는 없다. 해설사 류씨에 의하면 조만간 모작이 완성될 것이라고 한다.

초여름 연두색 비가 내리면 들판을 걷고 있는 기분을 맛본다. 대륙의 아침을 짊어지고 오는 거대한 들판, 수륙 모두를 보듬고 큰 걸음으로 성큼 다가오는 아침이라도 좋고 태양의 오로라를 등뼈에 담고 넘어지는 노을을 담은 들판이라도 괜찮다.

사람들은 오롯이 서서 비를 맞듯 그 모두를 가슴에 담으면 그만이리라. 추적이며 흩날리는 연두색 비를 가만 손에 담아 보면 하늘이 오고 구름이 안기며 유성(流星)의 울음소리도 귓전에 와 닿는다. 그리하여 칠갑산은 우리 여행객들의 뜨거운 피를 쏟아 부을 사랑만 가득했다.

올라오는 길에 다리가 아프면 세종시 연서면 용암리에 있는 고복저수지의 민락정에서 다리쉼을 하며 휘파람을 불어보자. 함께했던 시인 안경숙님께서 최익현 선생의 함자를 에둘러 숨넘어가는 노랫말을 내놓았다.

-최초의 첫사랑은, 익지도 않은 땡감처럼, 현기증이 나고 어지럽기만 하다.-

사진=은봉 최병학(자유행복학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