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공(文貞公), 유인숙(柳仁淑)
문정공(文貞公), 유인숙(柳仁淑)
  • 황미숙
  • 승인 2014.06.16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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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미숙의 문명학당 <88>

<정도(正道)를 지켜 흔들리지 않았다>

유인숙(柳仁淑, 1485년(성종16년)~1545년(명종1년))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원명(原明), 호는 정수(靜叟), 의(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식(宗植)이고, 아버지는 사간 문통(文通)이며, 어머니는 이추(李抽)의 딸이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유인숙 전(柳仁淑傳)」에서 그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날에 유인숙은 도승지로서 옥에 있다가 얼마 후에 석방되어 경주 부윤이 되었다.

경진년 가을에 김해(金海) 사람 김억향(金億香)이 송사에 져서, 그 부사(府使)인 박영(朴英)을 원망하고 박영이 공과 더불어 집정자를 제거하기를 꾀한다고 거짓으로 꾸며 고하여 유인숙이 체포되었으나, 유인숙이 부임한 뒤로 박영을 만나 본 일이 없었음이 신문(訊問)한 사실로 증명되어 김억향은 무고죄로 반좌(反坐, 고발한 자가 도리어 죄를 받음)되고, 유인숙도 관직에 해임되어 시골에 가서 살았다.

신사년 가을에 추세를 관망한다는 죄목으로 고신(告身 직첩)을 모두 빼앗기고 정유년 겨울에는 다시 서용(敍用)되어 대각(臺閣)에 역임되었다가 갑자기 경상의 지위에 올랐다.

을사년에 명종이 즉위할 때에 숭정(崇政) 겸 이조 판서로 있다가 이기의 무리에게 배척당하여 귀양 갔다. 얼마 안 되어 사약이 내렸고, 또 정순붕의 상소로 말미암아 추가로 사형에 처하고 대역(大逆)으로 논죄하였다.

전지에 이르기를, "유인숙은 윤임과 혼인을 맺어 음모를 조성(助成)하였으며, 내심으로 지위를 잃을까 근심하는 마음을 품고 내가 왕위에 오른 것이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하여 몰래 사부(師傅)를 불러 나의 어둡고 밝음을 물어서 나를 병이 있는 사람이라 지목하였다. 혹시 나를 현명하다 말하면 흔연히 기뻐하지 아니하는 기색이 있었으니, 이는 모두 몰래 다른 뜻을 품고 자기의 욕심을 이루려고 도모함이로다. 죄는 종묘사직에 관계되고 법에 있어서는 용서할 수 없으니 사약을 내린다."하였다.

이기는 본래 여론에 용납되지 못하여 외척들과 관계를 맺어 안팎으로 세력을 규합하고자 하여 항상 족손(族孫) 한경록(韓景祿)과 더불어 심복이 되어 서로 왕래하며 밤마다 같이 유숙하면서 음모와 비밀스러운 계획을 꾸미었다.

그가 집에 있으면서도 비밀스러운 편지를 몰래 통하여 한경록의 집에 연락하는 것으로써 계책을 삼았으나, 남들은 알지 못하였다. 이기와 유인숙은 모두 한경록의 친족이 되고 그때 모두 판서로 있었다.

하루는 이기가 한경록을 시켜 내통할 일이 있었는데, 경록이 그 답장 편지를 그의 종에게 주어서 판서 집에 전하게 하였으나 그의 종이 잘못 유인숙에게 전하였다. 유인숙이 그 편지를 보고 그 비밀과 거짓된 일을 알고, 남에게 말을 해서 드디어 사림(士林)들 사이에 전파되어 모두 그 사람답지 못함을 통분해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유인숙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쳐서 기회를 타고 모함하여 마음껏 주륙을 가하고는 드디어 남에게 자랑하기를, "이 역적을 죽였으니 내가 이제는 통쾌하도다."하였다.

이기가 원한으로 말미암아 유인숙을 죽인 것을 여기에서 더욱 알 수 있다.

이연경(李延慶)이 병오년에 서울에 이르니 정순붕이 찾아보고 속마음을 터놓고 말하기를, "그대가 젊을 때에 원명(原明, 유인숙)과 더불어 교제하고 놀 적에 일찍이 절의(節義)를 위해 죽을 선비라고 이르더니 지금 어떻게 이렇게 죽었는고."하니, 이연경이 대답하기를, "나는 이것이 곧 절의를 위해 죽은 것이라 생각하오. 그 옳지 못함은 알지 못하겠다."하니, 유순붕이 낯빛이 변하며 돌아갔다.

사문(斯文) 유정(柳貞)이 곁에 있다가 두려워하는 낯빛으로 이연경에게 묻기를, "호랑이 앞에서 춤추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위험해 하는데 공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여 화를 일으키려 하는고."하니, 이연경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령(耳齡, 정순붕의 자)이 교활한지라 원명(原明, 유인숙)을 죽인 것은 자손을 위한 계책이었지만, 나와 같은 사람은 벗을 죽였다는 이름만 얻을 뿐이다. 자기에게는 이익이 없을 것이니 나는 걱정할 것이 없네."하더니, 과연 해가 없었다고 한다.

유인숙에 대해 일찍이 충정공 권발은 "호걸의 재사"라 칭송하였고, 이연경은 "의리와 절의에 죽었다."고 하였다. 기대승(奇大升)은 "선사(善士)였다."고 하는데, "그 때의 사람들이 평소의 유감과 원한을 가지고 마침내 대죄(大罪)를 빚은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무정보감(武定寶鑑)》을 보면 알 수 있다."하였다.

선조실록 교서(敎書)에는 "선왕의 고명(顧命)을 받은 원로이고 임금을 보필한 명경(名卿)으로 정도(正道)를 지켜 흔들리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논어》 위정편에서 공자는 "배우기만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생각하기만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 則罔, 思而不學 則殆)”고 하였다.

입으로만 읊어대는 도덕성은 또 다른 사건을 잉태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지각을 천천히 기르며, 스스로의 교육을 통한 자기 발전의 노력이 필요한 시대이다.

주어지는 학습에 의존하여 사색하지 않으며, 단편적인 지식의 전달 교육의 결과물은 지적 허영심만을 키운다.

학문은 이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질 줄 아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학문이 출세의 도구가 되는 사회가 빚어낸 우리의 슬픈 현실은 더 이상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