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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남터 북소리는 아직도 들려오는 듯 비극 간직
새남터 북소리는 아직도 들려오는 듯 비극 간직
  • 주장환 취재국장
  • 승인 2014.06.10 17: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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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흥선 대원군과 병인박해 下

 
병인박해 시기인 1866년 가을 소학골과 서들골 등에 육모방망이와 창칼을 든 포졸들이 에워쌌다. 이들은 교우촌에 거주하던 신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잔인하게 죽였다. 이때 순교자는 소학골 9명, 서들골 4명, 복구정 2명, 베장골 2명, 장자동 4명, 공심리 1명, 목천 1명 모두 23명으로 서울 좌포도청, 공주감영 등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갔다.

이때 오랏줄에 묶여 공주 감영에서 세상을 뜬 배문호, 최천여, 최종여, 고요셉 그리고 최씨 며느리 등 5명의 시신은 지금 성거산 성지 제1줄 무덤에서 한송이 은화로 피어나고 있다.

이 중 최천여의 신심이 눈물겹다.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주교 뮈텔이 1891년 2월, 서울에 들어와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여 만든 ‘치명일기(致命日記)’에 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여기에 보면 최천여는 관청에서 천주학을 배반하도록 회유 당했다. 그러나 쉽게 말을 들을 그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악독한 고문에 못 이겨 배교한 교우들을 찾아다니면서 '지금의 세상은 잠깐이오, 후세의 세계는 영원하니 어찌 잠시 살기 위해 배반하느냐'며 눈물로 말렸다.

▲ ‘치명일기(致命日記)’. 제8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주교 뮈텔이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여 만든 것이다.

병인박해 이야기의 일부를 우리는 이탈리아 희곡 ‘조선의 순교자들(The Martyrs of Corea)’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종교와 조국(Religion and Fatherland)’이란 부제가 붙은 이 희곡은 머리말에 “1866년 3월 8일의 순교에 대해 썼다”는 대목이 있다. 이날은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으로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이었던 장 베르뇌(장경일) 주교가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한 날이다.

여기에서 순교자는 병인박해 때 처형된 사람들로 베르뇌 주교를 포함해 다블뤼 등 프랑스 사제 9명과 홍봉주, 남종삼 등 천주교도 8000여 명에 대한 장엄한 서사시인 것이다. 희곡을 쓴 작가 이솔레리에는 사건 발생 이후 사건의 실태를 문학의 형식을 빌려 서구사회에 전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주인공 베르뇌 주교는 프랑스 르망 교구 출신으로 1856년 입국해 충북 제천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배론 신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대원군이 천주교 탄압 교령을 포고한 뒤 출국을 명했으나, 이를 거부하다 체포돼 군문효수(목을 베어 매다는 처벌)형에 처해졌다. 1968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諡福)됐고, 1984년 방한한 교황 바오로 2세가 성인으로 추대했다.

피의 현장은 서울 새남터에서도 볼 수 있다. 황사영(초기의 천주교 순교자. 신유박해 때 제천 배론 산중으로 피신하여 토굴 속에서 쓴 '황사영 백서'가 유명하다.)은 이렇게 피를 토하며 기록했다.

"사형 집행을 준비하는 동안 맑고 청명하던 하늘에 갑자기 두터운 구름이 덮이고, 형장 위에 무서운 선풍이 일어났다. 맹렬한 바람과 거듭 울리는 천둥 소리, 억수같이 퍼붓는 흙비, 캄캄한 하늘을 갈라 놓은 번개, 이 모든 것이 피비린내 나는 형벌을 집행하는 사람들과 구경꾼들의 가슴을 놀라고 서늘하게 하였다. 이윽고 거룩한 순교자의 영혼이 하느님께로 날라 가자 구름이 걷히고, 폭풍우가 가라앉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나타났다. 순교자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고, 시신은 다섯 날 다섯 밤 동안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그러나 매일 밤 찬란한 빛이 시신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였다."(황사영의 '백서', 81행; 신미년(1811년)에 조선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서한)

▲ 서울 만리동에서 서울역으로 이어지던 약현고개에 세워진 약현성당 순교성지 전시관에서 만나는 병인박해 이야기.

■ 사육신·남이장군 처형된 곳

새남터는 지금 서울 용산구 이촌동 199의 1번지에 있다. 원래 있던 지역인 노들(沙南基) 보다 500여m 안으로 들어와 있다. 이곳은 조선 후기까지 숲이 울창했다. 군문효수형을 받는 중죄인인 경우에는 서소문 밖 대신 이곳을 형장으로 사용했다. 세조 때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사육신이 충절의 피를 흘린 곳이며 1468년 모반죄로 처형된 남이 장군도 이곳에서 하늘을 원망했다.

대원군이 천주교인들의 형장으로 주로 삼은 곳은 이곳 말고 서울 한강변의 양화진두(절두산)그리고 제물진두(인천 중구 항동 1가) 등이다. 이처럼 처형지가 강변이나 해안가로 전해진 것은 대원군이 양이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진 땅은 그들과 통하는 무리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건의 여파는 컸다. 병인박해 때 탈출한 프랑스 신부 리델이 중국 톈진에 있던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를 알렸고, 프랑스 함대가 이를 빌미로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가 벌어졌다. 이 희대의 난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니만큼 생략한다.

병인양요 이후인 1868년 4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를 도굴한 사건이 일어나자 분기탱천한 대원군은 내포지방 교인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했다. 이 지방은 천주교회 창설기부터 신앙이 싹튼 곳이었기 때문에 많은 희생자가 났다. 그 뒤 1871년의 신미양요로 다시 박해가 가중됐다.

천주교는 병인박해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으나 1886년 한불조약 이후 서서히 불타올랐으며 2014년 8월 교황이 한반도에 오는 등 완전하게 되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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