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 사제 9명과 천주교도 8000여명이 순교한 장엄한 서사시
佛 사제 9명과 천주교도 8000여명이 순교한 장엄한 서사시
  • 주장환 취재국장
  • 승인 2014.06.10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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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흥선 대원군과 병인박해 上

 
구미열강 동진정책과 부딪혀 천주교인 희생 커져

사람들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미래를 내다본다. 우리 조선사에서 숱한 인물들이 명멸했다. 그 중에서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하 대원군)은 천주교사와 연관돼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박해를 당한 사람이 아니라 박해를 한 사람으로서의 대원군은 ‘씻지 못할 죄인’이다.

대원군이 등장하던 당시의 내외정세는 복잡하고 미묘했다. 안으로는 세도정권이 등장하여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세도정치로 인한 부정부패는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을 가져왔고, 그 결과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관의 기강은 극도로 문란하여 이방이 사또 알기를 ‘사타구니 때’만큼도 안 여겼다.

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눈치를 보며 숨죽이고 살았다. 어디를 가나 왕족에 대한 안동 김씨의 감시망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는 호신책으로 일부러 불량배와 어울려 다녔다. 그러면서도 난을 친 그림을 팔아 입안에 거미줄만은 면했다.

한편 조선을 둘러싼 외세의 도전은 한반도에 격량을 몰고 왔다. 이른바 ‘대항해 시대’에 재미를 붙인 구미열강은 전세계를 유린하다 마침내 한반도로 진출하게 됐다.

"이양선(異樣船)이 근해에 출몰하는 일은 듣고 보니 매우 놀랍고 의아스럽습니다. 대저 이 무리들은 설령 내침하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급급하게 문정(問情·사정을 캐어보는 일)할 필요는 없습니다. 먼저 일 처리에 재간 있는 서리(胥吏)와 장교 각 1인을 변복(變服)하게 한 다음 약간의 미포(米包)와 생선을 지닌 채 작은 배를 타게 하되, 떠돌이 상선 모양으로 그 이양선과 물품 매매를 하게 하면서 그 배에 들어가서 배 안의 동정을 살피도록 한 뒤에 서서히 느긋하게 문정할 일입니다."

▲ 절두산 순교기념관. 병인사옥 때 처형된 천주교도들을 기리고자 세웠다.

■ 이양선에 대원군 경계심

이양선은 조선 후기 우리나라 연해에 나타난 외국선박이다. 상기 글은 우리나라에 출몰하는 이양선에 대처하는 요령을 정리한 대원군의 글로 누군가에게 내린 명령이다. 여기서 우리는 구미 열강에 대한 대원군의 경계심을 엿보는데 모자람이 없다.

학자들은 대원군이 또 다른 편지에서 "서양 오랑캐들이 이미 도망했습니다. 개선한 군대에 대해서는 오늘 전하께서 친히 시상하시어 인심이 진정되었으니 다행스럽고 다행스럽습니다"고 쓴 걸로 유추해 병인양요(1866년 9월)나 신미양요(1871년 6월) 무렵일 것으로 보고 있다.

병인양요가 발생하기 직전인 1866년 7월,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통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재물을 약탈하다가 평양 군민과 충돌을 일으켜서 배가 침몰했다.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 가라앉았다는 소식을 접한 대원군은 이 배의 복제 계획을 세웠다. 말하자면 외국 함대의 위력에 놀란 대원군이 벤치마킹하여 우리도 한 번 건조해보자는 의미였다.

대원군은 김기두 등 기술자를 시켜 수십만 냥의 돈과 조선에서 나는 청과 동을 거의 다 쏟아부어 10년 후인 1876년 제너럴셔먼호와 똑같은 형태의 선박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목탄을 원료로 사용한 이 배는 움직이지 않거나 움직여도 굼벵이 걸음이었다. 비난이 빗발쳤으나 전함을 만들려는 그의 의지는 굳건했다.

대원군은 또 ‘학우조비선(鶴羽造飛船)’이라는 배를 개발했다. 이는 학과 두루미의 깃털을 모아 아교로 연결하여 배에 붙인 것으로 어느 작자가 “배가 포탄에 맞더라도 물에 가라앉지 않는다”고 꼬드겨 만들었다. 한강변에서 시연하기 전까지 만해도 대원군의 가슴은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시연과정에서 햇볕에 열기구와 깃털 사이를 붙인 아교가 녹으면서 실패했다. 대원군은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올랐다.

학우조비선을 개발하기 위해 학, 두루미, 기러기들을 잡아들여 깃털을 뽑았다고 하니 열망이 눈을 가린 것인지 원래 무지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절두산 순교지 표지석. 병인박해 때 순교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 등이 보인다.

■ 성거산 성지 천혜의 은거지

1800년대 들어 서구 열강들은 제국주의 무대를 아시아 지역으로 옮겨오면서 선교사를 파견해 정보를 얻고 서양 문화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조상의 제사를 거부하고 서양 신을 믿으라는데서 우리의 뿌리 깊은 전통문화와 크게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천안 차령산맥 줄기에 위치한 성거산 성지는 사방에서 새들이 우는 소리로 가득하다. 참나무가 성기게 분포돼 있는 소나무보다 더 많이 눈에 띈다. 이 지역 소학골을 사목 중심지로 활동했던 칼래 신부는 "독수리 둥지처럼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호랑이가 득실거리고 숲이 우거진 산들로 둘러 싸여 청정한 공기를 마시면서 도 누구에게도 발각될 걱정없이 초가집에서 나와 이곳저곳 절경을 찾아 눈앞 가득 펼쳐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즐길수 있고,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감상할 수도 있다"며 이곳이 천혜의 은거지임을 설명하고 있다.

이곳은 신유박해 전후부터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순교자들이 피신해 신앙생활을 영위했던 비밀 교우촌이 있던 곳이다. 그들을 숨어 있는 꽃, ‘은화’(隱花)라고 불렀는데 야생화는 무명 순교자들을 상징한다. 지난달 초에는 대전교구 천안 성거산성지 주최로 ‘야생화는 말한다’를 주제로 한 전시회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