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사에서 가장 비극적이며 영웅적
한국 천주교사에서 가장 비극적이며 영웅적
  • 주장환 취재국장
  • 승인 2014.05.27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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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김대건 신부와 병오박해(1846년) 下

 
■ 길림성 小八家子 진입로는 '대건로'

이쯤해서 김신부의 일부 행적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벽서사건을 일으킨 황사영처럼 그도 어느 한 부분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바로 조선 해안지도를 프랑스에 넘기려다 발각된 일 때문이다.

1846년 김신부가 작성한 조선전도(Carte de la Corёe)는 원본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우리나라에는 사본이 국회도서관과 독도박물관 등에 소장돼 있는데 요즘 눈높이로 치면 지도라고 부르기엔 낯 간지럽다.

▲ 김대건 신부가 프랑스 영사 드 몽티니에게 전달한 조선 해안지도. 그의 이런 행동은 많은 말들을 낳았다.

이 지도는 중국에 있던 프랑스 신부들에게 조선 입국 경로를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기 직전, 북경의 프랑스 영사 드 몽티니에게 전달됐다. 이 행동은 문화 사대주의적 발상이라고 해도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이 지도에서 눈에 띄는 것이 독도와 울릉도다. 울릉도는 ‘Oulangto’로, 독도는 ‘Ousan’ 즉, 우산(于山)으로 표기돼 있다.

우산은 아시다시피 신라 지증왕 때 독도와 함께 복속된 울릉도를 말한다. 이걸 근거로 프랑스는 두 섬을 아울러 ‘Is Dagelet(다줄레 군도)’라고 표기했다. 이 증거는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왜놈’들의 주장을 무색하게 만든다.

아무튼 이 문제를 두고 일부에서는 김신부가 외세를 끌어 들이는 반역행위를 했다고 주장하며 오늘날까지도 남 흔들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에 의해 분란의 중심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교회가 예수의 몸으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예수의 뜻을 해석하는 문제에 있어선 항상 의견이 엇갈리듯 여기서도 그렇다.

1841년 겨울 한 허수룩한 차림새의 나무꾼이 변문에 나타났다. 그는 조선으로 들어가려 이곳 사정을 알아보려 나선 김대건 신부였다. 이곳은 조선의 국경도시 평북 의주로부터 48㎞ 떨어진 지점으로, 한국인이 중국에 들어가는 관문이자 별정소(別定所:출입국 관리소)가 있다.

몇 번 조선으로 입국을 시도하던 그는 위험을 느끼고 요동땅 백가점 교우촌으로 되돌아간다. 이때 길 위에서 눈보라에 쓰러져 불귀의 객이 될 뻔 했으나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건진다. 그러나 ‘하고자 하면 못하는 일이 없다’는 말처럼 1845년 1월 중순, 대륙의 눈보라를 안고 마침내 서울로 들어오는데 성공한다.

이후 상하이와 제물포 등을 오가며 선교활동을 하던 김신부는 선교사의 입국과 선교부와의 연락을 위한 비밀항로 개설을 위해 5월 14일 마포를 떠났다. 연평도를 거쳐 백령도에 이르러 청국 어선과 접촉, 편지와 지도를 보내고 순위도로 돌아왔을 때가 6월 5일이었다.

김신부는 이날 관헌에게 체포돼 닷새 후에 해주 감영으로 이송됐다가 6월 21일 서울로 압송돼 포청에 갇힌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가을의 양광이 채 여물기도 전인 9월 16일, 그는 군문효수형(죄인의 목을 베어 군문 앞에 매다는 형벌)으로 새남터의 북소리를 들으며 26세의 짧은 삶을 마감한다.

김신부가 서울 포청으로 압송된 후 일부에서는 해박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을 아깝게 여겨 배교를 권하자 오히려 그들을 교화 시키려고 했다니 삶과 죽음의 차원을 넘어선 경지에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 새남터 순교 성지. 새남터는 ‘억새와 나무가 많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망나니들이 죄를 숨기기에 좋았다.

■ 충남 당진 솔뫼는 김신부 고향

충남 당진에 있는 솔뫼는 김대건 신부의 고향이다. 2004년 9월 22일 생가가 복원됐으며 동상은 물론 여러 성인과 순교자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이곳에는 순교자 신앙을 가르치고 전하는 ‘솔뫼 피정의 집’이 있어 순교자들의 신앙의 학교로 거듭났다. 여기에도 김대건의 족적은 뚜렷하다. 마카오와 필리핀 그리고 만주 벌판에서의 고된 삶이 그가 태어난 솔뫼에서 금강석으로 되살아 숭고함을 더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곳은 요즈음 8월 중순 방문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맞기 위해 시작한 보수 공사로 좀 어지러운 상태다. 교황은 광복절인 8월 15일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성모승천대축일 미사를 집전한 후 이곳에서 열리는 '6회 아시아 청년대회' 개막식에 참석한다.

성지 안으로 들어서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상 머리 위에 'INRI(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 Iesus Nazarenum Rex Iudorem)'라고 쓰인 표지판을 볼 수 있다. 먹구름이 몰려오는 날에 머리 들어 그 모습을 바라보면 두려움마저 든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지면서 몇몇 유대 사제들은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 대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야 한다고 따졌다. 그러자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다”며 잘라 대답했다고 한다. 빌라도도 두려움을 느꼈던 것일까?

■ 증조부부터 신앙DNA 물려 받아

생가와 기념관 사이에 있는 솔뫼 아데나에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상을 하얀색 석주로 멋지게 조성해 놓았다. 원형으로 꾸며져 마치 먼 옛날 로마의 어느 거리에 서 있는 듯 했다.

왼손에 성경책을 안고 오른손을 들어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김신부 동상과 예수가 십자가를 메고 걸었던 고난의 길을 본뜬 '십자가의 길', 그리고 김대건 생가 등에서 일상의 번잡함을 내려놓을 수 있다.

김신부가 어린 나이에도 천주교에 귀의할 수 있게 된 동기가 궁금해진다. 어린 그가 그토록 깊은 심신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집안 내력이었다. 잠깐 소개하면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에서 신앙은 비롯됐다.

그가 신해박해(1791년) 때 체포된 것을 보면 천주교가 들어 올 즈음 이미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01년에 유배되었으며 1805년 해미에서 다시 잡혀 10년 감옥살이 끝에 1814년 옥사했다.

김진후의 셋째 아들 김종한 역시 안동으로 피신해 신앙생활을 이어갔으나 1815년 을해박해 때 잡혀 대구 감영으로 이송돼 이듬해 참수 당했다.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은 용인 골배마실에 정착하고 1836년 초에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당시 10세이던 김대건은 모방 신부의 천거로 신학생으로 선발돼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이야기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다. 이런 DNA가 어린 김대건에게 그토록 강인한 정신을 한 겹 더 추가해 준 것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