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신부, 새남터 북소리 들으며 26세 짧은 삶 "마감"
김대건신부, 새남터 북소리 들으며 26세 짧은 삶 "마감"
  • 주장환 취재국장
  • 승인 2014.05.27 13: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⑤ 김대건 신부와 병오박해(1846년) 上

 

최초로 마카오 유학 갖은 고생 끝 성인 반열

어화 벗님네야
우리 본향 찾아가세.
인간 영복(永福) 다 얻어도
죽고 나면 허사되고,
세상 고난 다 받아도
죽고 나면 그만이라.
아마도 우리 낙토(樂土)
천당밖에 다시 없네.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 '사향가' 중에서)

▲ 서소문 성지 표지석.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마카오 성 바올 성당 계단에서 바라본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홍콩에서 왁자하게 투전판을 벌이는 객(客)들이 가득한 페리호를 타고 이곳에 도착한지 30분만이었다. 어제 내린 장대비로 홍콩만(灣)은 황톳빛이었고 파도는 거셌다. 먹구름은 홍콩만 서쪽으로부터 길게 늘어져 마카오까지 이어졌다.

그 먹구름을 보며 병오박해 때의 한 인물,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을 떠올렸다. 그가 도착했던 1837년 7월의 마카오도 오늘처럼 먹구름이 엄습했을까? 그랬다면 그 먹구름은 당연코 김대건 신부의 미래를 어둡게 덮으려 했음에 틀림이 없다.

김대건은 한국 천주교사에서 매우 비극적이기도 하지만 영웅적인 장면을 만들었다. 기독교와 과학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서구세계가 조선사회의 골수 속에 파고드는 시기에 그는 한국 천주교 역사의 물레방아같은 동력으로 등장했다.

그의 삶은 극적이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외국물’을 먹을 수 있는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그러나 그 행운은 올가미가 되어 돌아와 비극을 낳았다. ‘고진감래’니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같은 말을 다 헛물켜기였다.

▲ 김대건 신부 생가터. 10살 때까지 이곳에서 살던 김대건은 모방 신부의 천거로 신학생으로 선발돼 서울로 올라갔다.

김대건은 1836년 7월11일 프랑스 신부 모방(Maubant)의 눈에 띄어 천주교 유학생으로 결정돼 12월 15일 서울을 떠나 마카오로 향한다.

한 해가 저무는 12월 중순이면 한파가 내습하는 시기다. 이제 갓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이 제대로 된 방한 도구도 없이 엄동설한에 만주같은 동토지대를 거쳐 시퍼런 파도가 넘실거리는 대양을 건너 마카오로 간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인내심과 용기 없이는 힘들다.

그는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8개월 간의 장도 끝에 이듬해 7월 6일 포르투칼 속령이었던 마카오에 도착한다. 그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 임시 조선신학교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여기서 이들은 칼르리 신부와 대표부의 신부 그리고 임지로 가기 전에 잠시 머물던 중국 선교사들에게 라틴어와 천주교사 등을 배웠다. 이 과정에서 최방제가 5개월여 만인 1837년 11월 27일 말라리아로 사망하는 불운이 일어난다.

그러다 1939년 5월 농민폭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이들은 다시 보따리를 싸들고 마닐라로 피신하게 된다.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30여km를 가면 롤롬보이(Lolomboy) 라는 곳이 나타난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놓여져 있어 자동차로 금방 닿지만 당시에는 강으로 연결돼 있는 오지였다. 여름같은 늦봄의 폭동을 피해 허겁지겁 또 다시 낮선 곳으로 건너 온 김대건 일행은 도미니꼬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농장에 기거하면서 세월을 죽인다.

그렇게 ‘죽인 세월’은 146년이 지난 1986년 5월에 보상으로 돌아 왔다. 김신부의 동상이 이곳에 세워진 것이다. 2003년 10월에는 수원교구 성안드레아 수녀회에서 이 일대를 사들여 성지로 조성했다. 한국식으로 담을 쌓고 기와를 얹은 성지에 김 신부의 동상이 모셔져 있다.

또 피란 당시 묵상을 하거나 고향을 그리던 김신부가 즐겨 찾았다는 망고나무와 표지석이 있다. 뒤편으로는 남방불교식 탑이 보인다. 같이 유학을 떠났던 최양업 신부의 동상도 볼 수 있다.

현재 마카오에 있던 외방 전교회의 대표부 건물은 아파트로 바뀌어 옛 흔적은 바람 속에서도 만날 수 없었다.

김대건 신부의 흔적은 길림성 장춘에서 서북쪽으로 자동차로 1시간 정도가면 나타나는 소팔가자(小八家子)에서도 볼 수 있다. 마을 주민의 대다수가 신자인 이곳은 김대건-최양업 두 사람이 공부했던 곳이며 한국 천주교 입성의 교두보이기도 했다.

현재 이곳에는 서울 가락동 본당 신자들이 모은 돈으로 조성된 김신부의 동상이 있다. 또 1999년에는 양쪽으로 키 큰 나무들이 터널을 만드는 소팔가자 진입로가 '대건로'라 명명돼 중국에서도 그 이름을 남기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