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 황미숙
  • 승인 2014.05.27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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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미숙의 문명학당 <87>

<자신의 도를 즐겼고[樂] 사람의 권세를 잊었다>

이언적(李彦迪, 1491(성종 22)~1553(명종 8)의 이름은 원래 이적(李迪)이었는데, 중종의 명령으로 '언(彦)'자를 덧붙여 '언적(彦迪)'이 되었다. 호(號)는 회재(晦齋), 자계(紫溪), 자계용(紫溪翁)이고, 자(字)는 복고(復古)이다. 경주 출생이며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그는 주자를 일생의 사표로 삼아, 아호를 회재(晦齋)라 했는데, 이는 주희의 호인 회암(晦菴)의 학문을 따른다는 뜻이다.

1531년(중종 26) 김안로 일파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세자의 사부라서 유배되지 않고, 파직만 당하였다. 이후 한양을 떠나 고향인 경주에 낙향하여 자옥산(紫玉山)에 올라 1532년 자옥산에 서실인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성리학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집중하였다.

그는 맹자의 진심장구 상에 나온 독락 장에서 이름을 따서 자신의 서재를 독락당이라 하였다. 맹자의 '진심장구 상'에는 "옛날 어진 선비만이 어찌 홀로(獨) 그렇지 않겠는가. 자신의 도를 즐겼고(樂) 사람의 권세를 잊었다.(古之賢士何獨不然. 樂其道而忘人之勢.)"라고 하였다. 그는 이를 신조로 삼아 학문에 전념하였다.

1547년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회재 이언적은 자신의 행보가 여강이씨 전체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무첨당(無添堂, 이언적의 부친인 성균 생원 이번(李蕃)이 살던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독락당에서 거주했으며, 여기서 얻은 측실에게서 서자 이전인(李全仁)을 얻고 살게 된다.

그의 소실은 그의 늙으신 부모를 공양했는데, 회재는 첩을 무척 아꼈다고 한다. 그는 박숭부(朴崇阜)의 딸 함양박씨와 결혼했으나 오래도록 아들이 없어 사촌 동생 이통(李通)의 아들이자 5촌 조카인 이응인(李應仁)을 양자로 삼았으며, 서자로는 기녀에게서 낳은 서자와, 양주석씨로 김포군만호 석귀동의 서녀에게서 낳은 이전인(李全仁)이 있다.

후일 사람들은 이응인을 본가로 돌려보내고 서자인 이전인을 적자로 올릴 수 있지 않느냐고 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주자가례를 고집, 가산과 학문은 이응인에게 전수했다.

1544년(인종 1년) 봄, 송인수(宋麟壽)와 백양사(白場寺)에서 만났다. 그해 병이 생겨 거듭되는 관직 임명을 사양했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종 즉위 후, 그는 다시 조광조의 사면 복권을 청하였는데 인종이 동의하여 성사시켰다. 그는 서경덕, 조식 등의 학문적 명성을 전해 듣고 이들을 조정에 천거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는 다시 서경덕을 찾아가 협력하고 도와줄 것을 요청했지만 서경덕은 사양하였다. 오히려 서경덕은 그를 보고 인종이 덕망 높은 성군의 재질을 지녔지만 수명이 길지 못할 것이라면서 크게 통곡했다고 한다.

퇴계 이황은 그를 현인이라 불렀다. 이황은 이언적의 학통을 직접 계승하지는 않았지만, 이언적은 김종직의 적통으로 학문을 계승하였으므로 자신의 학문적 연원을 이언적에 연결시켰다. 이황 이후의 영남 사림들도 자신들의 학문적 연원을 김종직→손중돈→이언적→이황으로 연결하여 김종직으로 학문적 연원을 삼기도 했다.

동방 5현의 한 사람으로 지정되어 광해군 때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명종의 묘소에도 배향되었다. 그 뒤 영남학통의 매개자이자 김종직과 이황 사이를 잇는 중요한 인물로 추대되었다.

묘소는 경상북도 영일군 연일읍 달전리(현,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에 안장되었으며, 묘소 근처에는 신도비가 세워졌다. 첫 신도비는 기대승의 글을 1577년(선조 10년)에 이산해가 글씨로 비석에 새겨 넣었으나 후에 망실되었다. 1586년(선조 10년) 손엽이 다시 신도비를 썼는데 현재까지 전한다.

그의 서자 이전인은 뛰어난 학행과 효심이 남달랐으나 서자라는 이유로 이언적의 대를 잇지 못했다. 1583년(선조 16년) 변방에서 이탕개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병조판서 율곡 이이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제안으로, 전쟁에서 공훈을 세우거나 군량미를 내면 서얼에게도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태종의 유언을 빌미삼아 서얼차대에 집착했던 양반들의 반대에 부딪쳐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이의 납속 허통 주장은 서얼허통의 물꼬가 됐다. 바로 이 때 이언적의 서손자이자 이전인의 아들인 이준도 납속허통을 받아 자신과 후손들의 과거 응시 길을 열었다.

그러나 서자 신분으로 부사직을 역임하고 은퇴 후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서얼차대가 유독 심한 지역 양반들이 서원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면서 서얼들의 유향소나 서원 가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정에서의 허통은 이루어졌지만 삶의 기반인 지역 사회에서 거부당한 이준은 71세의 나이에 다시 청원서를 올렸다. 그러나 그의 절절한 호소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언적이 유배 생활을 할 적에는 일찍이 책상 위에다 스스로 경계하는 말을 써 놓았는데, "하늘을 섬기는 데에 미진함이 있었는가? 군친(君親)을 위하는 데에 성실하지 못함이 있었는가? 마음을 가지는 데에 바르지 못함이 있었는가?"하였다.

"무불경(毋不敬), 사무사(思無邪)"라 했던가. 그 마음에 공경하지 않음이 없고, 그 생각에 부정한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그러나 현실은 성난 파도와 같이 부정한 것이 발흥되어 쉽게 믿지 못할 정도의 큰 힘이 되어있다. 그리고 모든 도덕적인 것을 동원한다고 해도 부정한 것을 당해내지 못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들은 그것을 지탄할 수 없으며, 대중은 떠밀려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이 엄청난 물살을 도저히 견뎌낼 수 없다며 바라보고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