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삼흉(丁酉三凶), 김안로(金安老)
정유삼흉(丁酉三凶), 김안로(金安老)
  • 황미숙
  • 승인 2014.05.19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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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미숙의 문명학당 <86>

<소인은 빌붙을 데가 없으면 그 뜻을 펴지 못합니다.>

김안로(金安老, 1481(성종12)~1537(중종32))의 자는 이숙(頤叔), 호는 희락당(希樂堂)·용천(龍泉)·퇴재(退齋), 흔(訢)의 아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귀양 갔다.

1522년 부제학(副提學), 1524년 대사헌을 거쳐 이조 판서가 되었으나 아들 희(禧)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결혼한 후부터 권력 남용이 잦아 영의정 남곤(南袞), 대사헌 이항(李抗) 등에 대해 탄핵을 받고 경기도 풍덕(豊德)에 유배되었다.

남곤이 죽자 1530년 유배 중이면서도 대사헌 김근사(金謹思)와 대사간 권예(權輗)를 움직여 심정의 탄핵에 성공하고, 이듬 해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서용되어 도총관(都摠管)·예조판서·대제학을 역임하였다. 그 뒤 이조판서를 거쳐 1534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그는 다시 임용된 이후부터 동궁(東宮: 인종)의 보호를 구실로 실권을 장악해 정적(政敵)이나 뜻에 맞지 않는 자를 축출하는 옥사(獄事)를 여러 차례 일으켰다.

정광필(鄭光弼)·이언적(李彦迪) 등 많은 인물들이 이들에 의해 유배 또는 사사되었으며, 왕실의 외척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도 실각 당하였다. 그리고 문정왕후(文定王后, 조선 중종의 계비 윤씨)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중종의 밀령을 받은 윤안임(尹安任)과 대사헌 양연(梁淵)에 의해 체포되어 유배, 이어 사사되었다. 허황(許抗)·채무택(蔡無擇) 등과 함께 정유삼흉(丁酉三凶)으로 일컬어진다.

허균(許筠, 1569~1618)은《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설부(說部)〉에서 김안로가 젊어서 관동에 놀러갔을 때 꿈에 귀신이 나타나 읊조리기를 “봄은 우전의 산천 밖에 무르익고(春融禹甸山川外), 풍악은 우정의 조수 사이 아뢰누나(樂奏虞庭鳥獸間)”라 하고는 이어서 말하기를,“이것이 바로 네가 벼슬길을 얻을 시어(詩語)이다.”고 하므로 꿈을 깨고 나서 이를 기억해 두었다.

다음해 정시(庭試)에 들어가니 연산(燕山)이 율시 여섯 편을 내어 시험을 치렀는데 그 가운데 ‘봄날 이원제자들이 침향정 가에서 한가로이 악보를 들춰보다.[春日梨園弟子沈香亭畔閑閱樂譜]’라는 시제(詩題)를 가지고 한(閑) 자를 압운(押韻)으로 해서 시를 지으라는 문제가 있었다.

김안로가 생각하니 그 글귀가 꼭 들어맞아 이내 그걸 가지고 써 냈다. 강혼(姜渾)이 고시관(考試官)이 되어 크게 칭찬하고 장원을 시켰다고 한다.

윤휴(尹鑴, 1617(광해군9)~1680(숙종6))의《백호전서(白湖全書)》〈잡저〉에서 김안로는 “권세가 한창일 때는 더욱 모질고 독해 사약을 받고 죽은 자에 대해서 혹시 거짓 죽었는가 싶어 약을 먹인 후 또 관솔불을 붙여서 그의 코 속에다 넣어보아 죽었는지 살아있는지를 가늠했는데, 급기야 안로 자신이 갈원(葛院)에서 사약을 받았을 때 약을 먹여도 죽지 않자 다시 목을 조르고 금부(禁府)의 아전이 또 기름을 코 속에다 넣고 태워 콧마루가 모두 타 문드러지고 낯이 옻칠을 한 것처럼 되었다는 것이다. 옛날 당(唐) 노암(路巖)이 재상으로 있으면서 사람을 죽이고는 반드시 그의 목구멍 뼈를 서너 치 쯤 잘라오게 하여 죽음을 확인했었는데, 그 후 자기가 귀양살이 끝에 베임을 당하면서 결국 그 형(刑)을 당하였다. 하늘이 아무리 넓어도 그 법망은 개미 한 마리 나갈 수 없는 것이어서 똑같은 화가 자신에게도 닥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일반인가보다.”라 하였다.

또한 김안로가 연경에서 사주(四柱)를 보았더니, 그 시에 말하기를, “네 수가 서로 만날 때 정승에 오르고(四數相逢大器鼎), 적호 당년에 급제에 이름 붙으리(赤虎當年及第名), 적계 저월 백마일에(赤雞猪月白馬日), 칡덩굴이 원에 얽혔는데 쥐를 보고 놀라리라(葛藤連院向鼠驚)”하였다.

첫째 구는 관직이 정승에 오를 것이라 한 것이고, 둘째 구는 병인(丙寅)년에 급제한 것을 말하고, 셋째 구는 정유(丁酉)일을 말하는 것이고, 넷째 구는 갈원(葛院)에서 죽을 것을 말한 것이요, ‘쥐를 향해 놀란다’는 말은 그 당시 사약을 가지고 온 도사(都事)가 갑자생(甲子生)임을 말한 것이다. 복서(卜書)는 믿을 만한 것이니, 운명을 어찌 피하겠는가라 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중종조 고사본말(中宗朝故事本末)〉에서 “김안로로 문형(文衡)을 삼았다. 사신(史臣)이 논한다.

‘안로가 이로부터 위엄과 권세를 한 주먹에 쥐었고 세력이 불꽃처럼 날로 성해서, 이름난 재상과 뜻 있는 선비들이 많이 귀양가고 죽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사헌부의 문에 쓰기를, 나라의 권력이 거꾸로 안로의 손에 떨어졌으니(國柄倒落安老手), 백년 사직 누가 주인인가(百年社稷誰爲主)하였다. 대개 난을 일으킨 자는 비록 안로지만 안로를 쓴 것은 임금의 마음이 가리워졌기 때문이다.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명철인데 이는 요임금도 어렵게 여기셨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맞는 말이다.”라고 적고 있다.

구중궁궐에 임금을 가두고 명분과 공론을 동원하여 조종을 전횡했던 간신의 대명사인 김안로를 누가 탓할 것인가. 아니면 명철하지 못한 임금만을 탓하고 말일인가. 요임금조차도 어려운 일이라는데, 그러면 누가 가능하다는 것인가.

《논어》〈자로〉편에서 말하기를 “군자는 어울리되 패거리를 짓지 않고, 소인은 패거리를 짓되 어울리지 않는다(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고 하였다. 그러나 대인인지 소인인지 모를 일이다. 그냥 패거리 짓고, 어울리고 살아가는 일이 다반사다. 이제 흐지부지 제자리로 돌아가려한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로 잊는다. 여전히 세상은 여전히 제 갈 길로 가는 것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