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세계관 지녔던 천주교인들 해가 떠도 보이지 않아"
"진보적 세계관 지녔던 천주교인들 해가 떠도 보이지 않아"
  • 주장환 취재국장
  • 승인 2014.05.14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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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 - 下

 
기해박해는 전국적 규모로 이뤄져
천주교인이라고 의심되는 자는 바로 잡혀 들어가

순조가 11세에 등극하면서 정순황후(벽파)가 수렴첨정했다. 이때 남인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천주교 박해에 나선 것이 신유박해다.

벽파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으로 목을 조여 갔다. 300명 이상의 희생자가 생겼고, 정약용, 정약전은 배교하여 경상도와 전라도로 각각 유배됐다. 남인의 주요인물들이 모두 참수 또는 옥사, 유배됨으로써 끝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박해는 3월 초순 주문모 신부의 자수로 더욱 심해졌다.

▲ "네 가지를 옳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란 뜻의 사의재에서 쓴 글이라는 뜻의 사의재기. 다산 정약용이 신유박해 때 강진으로 유배되어 처음으로 묵었던 곳이 사의재다.

이로 인해 로얄 패밀리에게도 칼날이 겨눠졌다. 주신부에 대한 국문으로 이희영 9명이 포박됐는데 이때 주신부를 한때 궁 안으로 피신시킨 사실과 세례를 받은 일이 드러나, 은언군 이인의 처 송씨와 그의 자부 신씨가 사약을 받았으며, 강화에 유배 중이던 은언군에게도 사약이 내려졌다.

은언군은 참으로 안타까운 삶을 살았다. 그는 장헌세자의 서자로, 어머니는 숙빈 임씨다. 처지를 잘 이용하여 상인들과 거래하다 1771년(영조 47) 상인들에게 진 빚이 영조에게 알려지는 바람에 3년간 유배됐다가, 영조가 죽자 복권되어 흥록대부에 올랐다.

당시 실세였던 홍국영은 은언군의 장자 담(湛)을 왕으로 밀었으나 오히려 모반죄로 유폐당하고, 은언군도 강화로 떠났다. 그 뒤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자, 숙청 대상 1호로 지목돼 있었던 것이다.

신유박해는 12월 22일 천주교를 사교로 단정하는 토사교문(討邪敎文)을 반포하면서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으며, 처형된 자가 약 100명, 유배된 자가 약 400명에 달했다.

신유박해로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 대부분이 사라졌다. 살아남은 교인들 역시 유배를 당했거나 오지로 꼭꼭 숨어들어 해가 떠도 보이지 않았다.

■ 삼성산에 묻힌 순교자들

2014년 관악의 봄은 푸르렀다. 그 줄기인 삼성산 능선 안부(鞍部)에 조성된 천주교 삼성산 성지는 까치들이 먼저 날아와 울어대고 있었다. 성당을 지나 물이 졸졸 흐르는 골짜기를 따라 한 5분 쯤 올라가자 삼성산 성지라 새긴 표지석이 나타난다.

▲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3인의 희생자들을 모신 삼성산 성지.

성지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조성되어 있고 ‘곧 떠날 것처럼, 영원히 살 것처럼’(브뤼기에르 주교) ‘서로 사랑하고 남도 사랑하십시오’(샤스땅 신부) 같은 어록이 나무 이곳저곳에 걸려있다.

기해박해(1839년)때 군문효수의 극형으로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范)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羅) 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鄭) 신부의 유해가 모셔진 터도 보인다. 이들이 잠든 터에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묵상을 하고 기도를 드린다.

기해박해는 1839년 3월부터 10월까지 계속됐다. 신유박해와 마찬가지로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시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으려는 벽파의 풍양 조씨가 일으킨 것이다.

시파인 안동 김씨는 천주교를 싫어하는 벽파와는 달리 관용적이어서 헌종 초기에는 천주교에 개의하지 않았다.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의 아버지 김조순이 1832년에 죽고, 2년 뒤 순조가 죽자 헌종이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됐다. 따라서 왕실의 최고 지위에 있던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됐다.

이때 대비의 오빠 김유근은 큰 병에 걸려 있었는데, 유진길의 권유로 1839년 5월에 세례까지 받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천주교에 관대한 정책을 폈다. 그러나 김유근이 정계에서 은퇴하면서, 천주교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우의정 이지연에게 정권이 넘어갔다.

당시 형조판서 조병현은 천주교신자들의 입장을 가능한 한 이해하려 했다. 그래서 그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배교를 권하였으나 듣지 않자, 이지연에게 보고했다. 이지연의 지시로 서울과 지방에 오가작통법이 재시행되어 대대적 색출에 나섰으며, 9명이 사형 당했다.

수원으로 피신했던 주교 앵베르도 배신자의 책동과 고발로 자수를 했으며, 충청도 홍주에 있던 모방과 샤스탕도 서울로 압송되어 추국을 받고 새남터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이던 주교 앵베르가 처음 기록한 <기해일기>에 의하면 참수된 사람이 54명이고, 옥중에 교수되거나 장을 맞아 죽고 병들어 죽은 사람들이 60여 명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와중에 배교하여 석방됐던 사람도 40∼50명에 달했다.

기해박해는 강원도·전라도·경상도·충청도 등 전국적 규모로 이뤄졌다. 교인이라고 의심되는 자는 바로 잡혀 들어갔고 도망자들이 헤아릴 수도 없었다. 가장 박해가 심했던 곳은 경기도와 서울이었고, 이 지역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기해박해로 세도파이던 안동 김씨가 몰락하고 풍양 조씨가 자리를 차지했다. 이로써 조씨 가문의 세도정치는 1849년 철종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계속됐다.

개화기의 천주교인들은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인 진보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체제 위협 세력으로 본 나라와 당권을 거머쥐려는 세력들 사이에서 속절없이 희생된 가여운 영혼들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