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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대지주 며느리 이순이 "나를 잃은 것을 슬퍼마세요"
그녀의 순교에는 자유,평등,인간존중 가치관 녹아 있어
전주 대지주 며느리 이순이 "나를 잃은 것을 슬퍼마세요"
그녀의 순교에는 자유,평등,인간존중 가치관 녹아 있어
  • 주장환 취재국장
  • 승인 2014.05.13 18: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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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 - 上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당파 싸움의 뿌리
평등성과 사랑, 배려정신으로 존재의미 찾아

조선 천주교인들에게 있어서 순교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은 물론 일가 친족까지 죽음으로 몰고 가는 극단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의 순교사는 놀랄만한 일로 가득 차있다. 어떤 학자는 우리나라의 순교사를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 탄압과 에스파냐의 종교재판에 비교하기도 한다.

순교는 보통 신앙을 증언하려고 목숨을 바치는 일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첫째, 실제로 죽임을 당해야 하고, 둘째, 그 죽음이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진리를 증오하는 자들로 인해야 하며, 셋째, 죽음을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 스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 서소문 순교성지. 한국 교회 최대의 순교성지다. 신유박해 때 황사영, 현계흠, 황심(토마스) 등 5명도 이곳에서 순교했다.

니체는 순교자를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인 인간’으로 보았다. 그러나 교회에서 순교자는 위대한 정신을 소유한 숭고한 사람이다. 순교는 어찌 보면 맹목적이며 거부해서는 안 되는 절대 존재에 대한 완벽한 복종이다.

조선 순교사에서 이런 절대복종은 박해라는 참사와 맞물려 돌아간다. 1791년 신해박해부터, 1866년부터 1871년까지 계속되었던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희생자들이 ‘맹목적이며 거부해서는 안 되는 절대 존재에 대한 완벽한 복종’으로 그런 고통을 기꺼이 감수했다.

서울대 국문과 정병설 교수가 낸 <죽음을 넘어서>라는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순이(신해박해 순교자로, 올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에서 주재할 시복식 대상자의 한 명)라는 여성이 바로 그런 타입이다. 그녀는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의 집안 출신으로 전주 대지주 유항검의 며느리였다. 물론 그녀의 순교를 복종과 맹목만으로 볼 수는 없다. 거기에는 자유와 평등, 인간존중이라는 새로운 가치관이 접목되어 있다. 정교수는 그녀를 "이전의 한반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인간형"으로 규정한다.

이순이가 죽음을 앞두고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녀의 절대적 존재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엿볼 수 있다.

"내 순교를 하게 되면 그 기이함을 어느 순교와 비교할 수 있겠어요. 다른 성인들이야 응당 할 일을 하신 것이겠지만, 감히 우러러나 볼 순교를 이 보잘 것 없는 생명에게 허락하시면 그런 황송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 내 죽은 것을 산 것으로 아시고, 산 것을 죽은 줄로 아시며, 나를 잃은 것을 슬퍼하지 마세요."

그녀는 또 남편 유중철에게는 "아버지가 가산을 물려주는 날이 오면 재산을 서너 등분을 하여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막내동생에게 후히 주어 부모님을 부탁하자"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라는 말에서 우리는 그녀의 자선과 배려 정신을 본다. 타인을 도와준다는 것은 천주교의 기본 교리다. 엄청난 유산의 일부분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겠다는 것은 바로 천주교 정신의 구현이다.

초기 천주교 사상이 조선인들에게 감화를 준 것은 인간 평등성과 사랑, 그리고 이웃을 도와주는 자선 정신 같은 것 때문이었다. 이는 공감대를 형성했고 소외층과 비판적 지식인을 끌어들였다. 물론 일부 반발도 있었지만 백정도 천주교 공동체에서는 양반과 같은 대접을 받음으로써, 천주교의 대중 포교력은 더욱 강해졌다.

▲ 황사영 백서. 이 백서로 천주교인들에 대한 조정의 불신이 극에 달했다.

■ 동굴서 백서 쓴 황사영

치악산 너머 산골짜기에서도 나무들이 기지개를 한껏 펴고 있다. 산골짝 지형이 배 밑바닥(舟論)처럼 보이는 이곳은 우리나라 기독교사에 큰 확을 그은 배론(徘論)성지다. 그 유명한 황사영 백서 사건의 무대이자 순교박해박물관(최양업신부박물관)등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1801년 신유박해는 황사영의 백서(帛書/비단에 쓴 글) 사건이 그 클라이맥스다. 이는 초기 천주교인들의 대외인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백서사건은 외세에 의존하겠다는 또 다른 사대주의의 발로이기도 하다. 정종합일((政宗合一)의 유교국가에서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외세에 손을 내민 것이다. 이는 서세동점(西勢東占) 시대의 제국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가혹한 박해로 인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당시 황사영은 충청도 제천 배론의 한 석굴에서 세 부분으로 구성된 백서를 썼다.

첫째, 조선 천주교 박해의 경위, 둘째,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여러 순교자들의 신앙과 사적, 셋째, 폐허가 된 조선 천주교회를 살리는 방도가 서술되어 있는데, ▲청황제와 친한 중국인 신자를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정치를 감호할 것 ▲청의 공주를 조선의 왕비로 삼아 천주교를 확산하도록 주선할 것 ▲수백 척의 서양함대와 5-6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선정부가 전교(傳敎)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협박할 것 등이다.

황사영은 끝 부분에서 “나라가 망해도 성교(聖敎)의 표는 남아야 할 것”이라고 부언하여, 조선의 분노를 증폭시켰다. 그는 이 글을 베이징에 있는 주교에게 보내기위해 황심이라는 사람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그가 체포되면서 글이 발각됐다. 황사영도 곧 붙잡혀 능지처참 당한다. 그에겐 ‘임금도 없고 아비도 없는 종교를 믿는 대역부도한 사학쟁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황사영은 16세에 진사시험에 합격, 정조임금이 친히 손을 잡고 장래를 보장했던 천재다. ‘시대를 앞서가는 천재는 때를 잘 만나면 그 재주가 살고 잘못만나면 죽는다’는 말이 들어맞는 불운아였다.

물론,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당파 싸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이 있었으며, 사림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눠져 이전투구를 벌였다. 동인은 또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섰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됐다.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였다. 이 사건은 벽파(왕당파)와 시파(사조세자 옹호 개혁파)로 쪼개지는 등 노론의 분열을 가져왔다. 벽파는 정순황후를 중심으로 천주교를 박해하는 세력이 됐다. 남인 계열도 서학에 대해 공격적이었던 공서파와 우호적이었던 신서파로 나뉘었다.

영조 사후 정조는 남인 신서파와 노론의 시파를 중용했다. 이들은 천주교를 문제 삼지 않았으나, 정조가 죽고 나서 벽파가 재집권하면서 천주교 박해의 서막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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