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윤(小尹)의 영수, 윤원형(尹元衡)
소윤(小尹)의 영수, 윤원형(尹元衡)
  • 황미숙
  • 승인 2014.05.12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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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미숙의 문명학당 <85>

<말은 꿀과 같으면서도 뱃속에 칼을 품고 있다.>

윤원형(尹元衡, ?∼1565(명종 20))은 본관은 파평(波平), 자는 언평(彦平)으로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넷째 아들이자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으로, 윤원량·윤원로의 동생이며 소윤(小尹)의 영수였다. 명종의 외숙으로 윤임, 김안로, 이량, 심통원 등과 함께 인척세력의 대표적 인물이며 을사사화를 날조했다. 정난정은 그의 첩이었다.

또한 선조 때의 동인의 영수 김효원(金孝元)이 한때 그의 집에도 출입했다. 김효원은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의 친구였는데, 뒷날 심의겸이 이를 문제삼아 공론화하면서 사림이 동서 분당하는 계기가 되었던 인물이다. 정적이었던 김안로는 그의 장인 김안수의 사촌 형제였고, 명종의 외삼촌이며 인종과는 10촌간이면서 조카사위가 되는 이중 인척관계였다. 세조비 정희왕후는 고조부 윤사흔의 누나였다.

윤원형은 세력을 잡자, 세자(世子: 仁宗)를 폐위하고 문정왕후 소생인 경원대군(慶原大君) 환을 세자에 책봉하려다가 이른바 윤임의 대윤(大尹)과 세력 다툼이 시작되었다. 1544년 인종이 즉위하자 삭직 당했으나, 8 개월 만에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여 문정왕후가 섭정하게 되자 다시 예조참의에 복직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인종이 죽고 명종 즉위 직후, 국왕의 장례는 5월장이 원칙이었으나 윤원로, 문정왕후, 이기(李?) 등과 함께 '인종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이니 대왕의 예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인종의 장례를 박하게 치르게 했다.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은 크게 세력을 얻어, 1545년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일파와 많은 선비들을 죽였다.

위력과 권세가 높아지자 뇌물이 폭주해, 성안에 집이 열여섯 채요, 남의 노예와 전장을 빼앗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살리고 죽이고 주고 빼앗는 것이 다 그의 손에서 나왔다. 또, 아내를 내쫓고 기생첩 난정을 정경부인에 봉하니, 권력을 탐하는 조신들은 그 첩의 자녀와 혼인을 하였다. 생살(生殺)의 권한을 잡은 지 20년에 사람이 원한을 품고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1546년(명종1) 형인 윤원로와 권력을 다투었으나 윤원로가 유배되자 더욱 세력을 굳히고, 1547년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 사건을 계기로 대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양재역 벽서 사건을 계기로 을사사화를 피한 사림이 대다수 끌려와 형문을 당하고 유배, 파면 당했다.[정미사화] 이 과정에서 사림파의 희생을 막으려는 이언적 등과 갈등하였고, 이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언적을 정계에서 축출한다.

국구이자 정승으로 세도를 부리다가,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정난정에 의해 독살된 본부인 연안 김씨의 계모 강씨가 윤원형과 정난정을 관아에 고발하였으며, 이후 양사의 탄핵을 받아 벼슬을 잃고 방귀전리(放歸田里)의 명을 받은 뒤 강음에 은거하였다. 일설에는 유배된 것이라 하며, 사약을 들고 오는 금부도사를 보고 첩 정난정과 함께 자살하였다고도 한다.

이이의 《율곡전서》〈논윤원형소(論尹元衡疏)〉에서 말하기를 “원형이 현명한 사람을 질투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미워함은 이림보(李林甫, 당 현종(玄宗)때 권신. 장구령(張九齡)에 뒤이어 19년 동안 재상으로 있으면서 환관, 비빈들과 내통하여 멋대로 전정(專政)을 행한 끝에, 안사의 난(安史之亂)이 일어나도록 만든 장본인)와 같고, 재물을 탐하여 만족할 줄 모름은 원재(元載, 당 대종(代宗)때에 이보국(李輔國)에 붙어 벼슬하였다. 이보국이 피살될 적에는 은밀히 그를 제거하는 음모에 가담하였고, 위 아래로 뇌물을 쓰며 충성되고 어진 사람들을 제거하여 자신의 이익을 탐하였다)와 같고 말은 꿀과 같으면서도 뱃속에 칼을 품고 있음은 이의부(李義府, 당 고종(高宗)때에 인물. 사람됨이 외모는 공손하고 웃음 띤 얼굴로 부드러운 말을 하였으나 속은 음험해서 사람들이 "의부(義府)의 웃음 속에는 칼이 있다.”하였고, 인묘(人猫)라 불렀다.)와 같습니다”라고 하며 윤원형을 척신(戚臣) 정치 세력의 전형으로 보았다.

《맹자》에서 “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자신이 더 부끄러움이다. 이 땅에서 사는 젊음이 버거웠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이 땅에 사는 어른이라서 미안하다. 제발, 이제는 재물과 권력을 탐하여 발생하는 희생은 생기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