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출항-침몰-구조까지 <7일간의 기록> 재구성
세월호 출항-침몰-구조까지 <7일간의 기록> 재구성
  • 주영준 기자
  • 승인 2014.04.22 18:0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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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간의 기록 재구성 =주영준 기자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었다. 모두가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청천의 벽력같은 그 슬픈 소식은 바닷바람을 타고 날아 들었다. “우리 아이가...” “내  아가가...” 옥죄어 오는 가슴은 눈물로 고여 내렸다.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눈물은 비가 되어 수백명을 삼켜 버린 바다로 처연하게 내리고 있었다. 모두들 바다를 향해 목놓아 울었다. 단장의 그 고통은 죽음보다 더했다.

2014년 4월 15일 오후 인천연안 여객 터미널. 주로 10대 중반 학생들로 이뤄진 여객들이 약간은 상기된 모습으로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바다에 안개가 자욱해 출항이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나돌았으나 오후 9시가 되자 세월호가 출항의 뱃고동을 길게 울렸다. 원래 7시에 출발하기로 했으나 예정된 시각보다 2시간 늦은 시각이었다.

출항이 임박해 지자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안산 단원고 학생들과 배웅나온 부모 형제 친척들이 가벼운 인사를 주고 받았다. 당일 인천여객터미널에서 출발이 예정돼 있던 모든 여객선은 운항을 포기했다. 그러나 돈에 눈이 어두웠던 세월호 선사는 출항의 닻을 들어 올렸다.

선사인 청해진해운은 '출항 전 점검보고서'에 화물 657톤, 차량 150대를 세월호에 실었다고 기재하고 인천항 운항관리실에 제출했다. 이는 실제보다 차량 30대 화물 500톤을 축소하여 보고된 것이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구렁이 담 넘어 가듯’ 슬금 넘어갔다.

여객 476명을 태운 배는 해무를 걷어 올리고 물살을 헤치며 쾌속항진해 갔다. 평균속도는 17노트로 정상적이었다. 세월호는 지연 출항에 따른 운항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항로를 변경해 수심이 낮은 곳을 가로질러 운항했다. 밤새 달린 배는 어느덧 남해로 접어들었다. 

8시경이 되자 선장 이준석씨는 3등 항해사 박한결씨와 조타수 조준기씨에게 브리지’(선교)을 맡기고 침실로 들어가 누웠다. 브리지는 선장과 항해사, 조타수 등이 배를 조종하는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세월호 브리지 근무는 조타수와 항해사가 1개 조가 돼 2인팀 2개 조, 3인팀 1개 조가 8시간씩 나눠 24시간 근무를 서고 선장은 별도의 당직시간 없이 틈틈이 감독한다. 박씨와 조씨는 사고 당일 오전 8시부터 근무 교대를 했다.

8시 33분, 배는 진도인근을 지났다. 8시 48분 경에는 배가 병풍도 북쪽 20km 부근에 이르렀다. 조금 지나자(37초) 배가 기우뚱하며 갑자기 전기가 나갔다. 당황한 항해사와 조타수는 어쩔줄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그러던 중 불이 다시 들어왔다. 비상배터리가 복구된 것이다. 박씨는 조타수에게 우측으로 5도 변침을 지시했다. 그런데 조타수가 키를 돌리는데 타(舵)가 훨씬 더 돌았다. 조타수는 2주전 조타기가 이상이 생겨 수리를 요청했던 일이 생각났다. 아찔했다.

▲ 침몰

이때 배의 선체가 급회전하면서 균형을 잃는 외방경사가 일어났다. 어디선가 ‘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49분 37초부터 49분 56초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배는 이후 20초 동안 22도를 돌아 상대적으로 완만하게 선회했다. 세월호의 속도는 49분 13초에 15노트로 줄었으며 23초 뒤인 49분 37초에는 10노트로 떨어졌다. 이보다 39초 뒤에는 다시 5노트로 감속하면서 엔진이 멈췄다. 선박의 속도는 계속 떨어져  51분 9초에는 3노트로 감속했다. 이때부터는 조류에 떠밀려 뱃머리가 남서쪽을 향한 채 북쪽으로 표류했다.

이 과정에서 배가 기우는 느낌을 받은 선장이 잠자리를 박차고 나와 브리지로 뛰어 들어 왔고 1등 항해사 2명, 2·3등 항해사 각 1명, 조타수 3명 등 8명도 모두 하얗게 질린 채 모여 들었다.
배가 왼쪽으로 급히 기울자 선장과 항해사, 조타수는 밸러스트를 활용해 배의 균형을 바로잡으려 애를 썼다. 밸러스트는 배 아랫부분 양쪽에 있는 거대한 물 탱크로 배의 균형을 잡는 중요한 장비다. 그러나 이미 배는 자신의 몸체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오전 7시 30분부터 3층 식당에서 배식이 시작됐다. 허기진 사람들은 식당칸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고 이도저도 귀찮은 사람들은 나머지는 4층 객실 내에서 늦잠을 즐기고 있었다. 배식 후 1시간 정도 지나 배가 흔들리면서 기울어지자 식기가 엎어지고 밥이 쏟아지는 등 난리가 났다.

‘쿵’ 하는 소리에 모두들 무엇인가 크게 잘못돼 가고 있음을 알았다. 경황이 없는 중에도 단원고 학생이 8시52분 경 119에 전화를 걸어 사고를 신고했다. 상황을 파악한 119 상황실은, 해경 측에 연결해 3자 통화를 시작했다. 119 측은 해경에 사고 위치가 진도·조도·서거차도 일대라고 말했다. 그러나 해경은 학생에게 정확한 위도와 경도를 물었다. 기가 막힌 119측이 ‘신고자는 선원이 아닌 탑승객이다’라고 알려주지만 해경은 위·경도와 배 이름, 상선인지 어선인지 여부 등을 학생에게 되풀이 물었다.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황금같은 시간은 이 과정에서 6분이나 낭비됐다.
 
조금 지난 8시 55분 브릿지에서는, 항해사가 떨리는 손으로 제주 VTS와 교신을 했다. 그는 “해경에 연락해 주세요. 본선 위험합니다. 지금 배 넘어 갑니다.”라고 신고를 했다. 혼이 빠져있던 선장 등은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9시 7분경 다시 가까운 진도 VTS와 교신을 시작했다. 이때 정신을 차린 선장이 선내 방송을 지시했으며 항해사는 ”여객들은 객실에 머물려 있으라“고 방송했다.
그러나 9시 7분부터 38분까지 진도 VTS와 세월호는 침몰 중인지,  여객이 탈출 가능한지 묻는 등 도무지 시간 아까운 줄 모르고 또 촌각을 허비했다.

앞서 9시 10분에 해양 경찰청 구조본부가 가동됐으며 9시 31분에 청와대에 문자로 현지상황이 보고됐고 40분에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했다.
이 사이 선내 방송은 계속 선내에 대기하라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배는 기울어져 사람들은 움직이기 힘들었다. 떨어져 내린 기물들이 사람들을 덮치기도 했다. 공포가 무겁게 내려앉으며 사람들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덜덜 떨었다.

단원고 2학년 신모군은 어머니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엄마 말 못할까봐 미리 보내놓는다. 사랑해.” 김모군도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배가 가라앉으려 해. 구명조끼 입고 침대에 누워 있어. 살아서 만나요.” 울먹이는 음성을 남기고 전화가 끊겼다. 박모군도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배가 반쯤 기울어져 아무것도 안 보여요. 나 아직 구명조끼 못 입었어요”라고 말했다. 이 가엽고 천진한 학생들은 대부분 탈출에 실패했다.

9시 40분 중앙안전대책본부가 가동되고 10시경 상황이 심각한 것을 보고받은 대통령이 놀라 “단 1명의 인명피해가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10시 9분 경 안전행정부 장관과 소방방재청장이 현장에 나타났다.

선장이 1등 항해사에게 퇴선을 지시한 것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9시 37분 이후로 보여진다. 퇴선 명령을 받은 1등 항해사는 승무원을 통해 이를 여객에게 전달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강 씨가 브리지 밖에 나가 있는 상태라 명령 전달체계가 흐지부지해졌다. 이 또한 이들의 무책임과 무신경을 보여준다. 8명이나 모여 있는데 담당자가 없다고 전달체계가 무너진다면 이건 제대로 된 조직이 아니다.
 

▲ 승객두고 선원들 탈출


이들 선장과 선원들은 마지막 교신이 끊긴 9시 37분 이후 15명 모두 자신들만 아는 비상구를 통해 탈출했다. 선장 이씨 외에 선박직 생존자는 1·2·3등 항해사 4명, 조타수 3명, 기관장·기관사 3명, 조기장·조기수 4명이다. 정신이 바로 박혔다면 이 비상구를 통해 여객들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객실 안에서는 일부 여객들이 위험을 느끼고 구명복을 입고 빠져나오기 시작해 배에서 마치 가랑잎처럼 바다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출동하여 대기 중이던 해경 구조선과 소식을 듣고 달려 와 기다리던 어선들에 의해 구조됐다.

배의 수장인 선장 이준석씨와 승무원들은 첫 번째 구조선을 타고 탈출했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들도 죽음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한들 아무것도 모르는 자식같은 아이들을 남겨두고 그리 쉽게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을까? 선장은 직업란에 일반인으로 기록하고 모포를 덮고 슬금슬금 걸어 다녔으며 5만원권 돈을 말리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는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그 시간에 '객실에 그대로 있어야 안전하다'는 방송만 믿고 있었던 학생 등 대부분의 실종자는 기울대로 기울어버린 객실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갇혀 생과 사의 문턱에 서 있었다.
 
한편, 승무원 박지영 씨는 배가 기울고 침수가 시작되자 구명 조끼를 학생들에게 던지며 대피 안내방송을 했다. 그녀는 학생들이 걱정하자 "선원들은 맨 마지막이다. 너희들 구하고 난 나중에 나갈게"라는 말을 남기며 학생들의 탈출을 도왔다. 그녀는 무전기로 브리지(선교)에 모여 있던 선박직 승무원들에게 10여 차례에 걸쳐 여객들을 비상 탈출시킬 것인지 ‘퇴선명령’ 여부를 물었지만 답신을 받지 못해 자발적으로 탈출을 시킨 것으로 알려져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줬다.

▲ 수색 작업

아르바이트를 하던 김기웅씨는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3층 로비에서 자고 있던 동료 3명을 깨워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다 여자 친구인 정현선씨가 선내에 있다는 걸 알고 동료들을 보낸 다음 선내로 되돌아갔다. 그는 겁에 질려있는 정씨와 여객 1명을 찾아내 함께 탈출을 사켰다. 그러나 아직 선내에 있는 여객들이 마음에 걸렸다. 두 사람은 기울어지는 선내로 다시 뛰어들어갔다. 이것이 김씨와 정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들은 4년간 교제했으며 올 가을 결혼을 약속했었다. 두 사람의 시신은 부평승화원에 나란히 안치돼 마지막 사랑을 확인했다.

안산 단원고 남윤철 교사는 배가 기울자 마지막까지 배에 남아 학생들을 대피시키다 차디찬 바닷물에 짧고 굵은 청춘을 마감했다. 그는 2대 독자였다. 대가 끊어지는 아픔을 겪고도 그의 아버지는 "의로운 죽음입니다. 끝까지 학생들을 살리려고 노력하다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저는 아들이 자랑스럽습니다"라며 초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여객 박호진씨는 배가 기울자 갑판을 벗어나 탈출하려 했다. 그때 그의 눈에 갑판 위에서 울고 있던 6세 된 권지연양이 눈에 들어 왔다. 앞뒤 가릴 것없이 그는 아이를 끌어안고 구명보트로 뛰어들었다.

뭍에 있던 사람들은 이날 오전 10시까지만 해도 아무런 일이 없으리라 했다. 모두 다 구조됐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마음 졸이던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12시가 조금 넘어 여직원 사망이야기가 흘러나오며 단원고 2학년 정모군의 사망 소식까지 이어지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오후가 되자 뭔가 불길한 기운이 현장을 감싸기 시작했다. 368명이나 구조됐다던 중앙재난대책본부의 말이 거짓으로 밝혀지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실종자가 300명이 넘었다. 국무총리가 현장으로 허겁지겁 뛰어오고 해경특공대 잠수부가 투입됐으나 어둑어둑 어둠이 내리고 사망자는 자꾸만 늘어갔다. 17일에는 대통령이 방문하여 진도 체육관을 찾아 독려하고 무인로봇까지 투입했으나 진전이 없었다.

체육관에 모인 실종자 가족들의 애간장이 녹아 내렸다. 발을 동동 구르고 몸부림을 쳤다. 울어도 울어도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피 눈물이 바로 이런 것인가 했다. 슬픔이 고여 원망이 생기더니 마침내 분노로 변했다. 저 무능한 관계당국을 쳐다보며 목을 놓고 기다리느니 차라리 내가 가자 울며불며 바다로 달려갔다. “얼마나 무서우니, 얼마나 고통스러웠니… 차라리 내가 죽고 말지”, 아직 한 번도 피어보지 못한 꽃같은 자식들 인생이 참담하도록 서러웠다.

18일 실종자 기족들은 답답하고 지친 나머지 "국민 여러분 정부의 행태가 너무 분해 눈물을 머금고 호소하려 합니다"며 "아이들을 살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아이들은 차가운 물속에서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있었을 것"이라며 울부짖었다.

이러는 사이 선체 내부에 진입하는데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으나 객실내부에 들어가는데는 실패했다는 소식도 같이 들려왔다. 19일에는 밤이 되자 조명탄 880발을 투하 하고 채낚기어선을 동원하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생존자 소식은 커녕, 사망자만 32명으로 더 늘어나고 있었다.

국민들도 트라우마에 빠져 들었다. TV를 보면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눈을 돌리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으며 교회든 성당이든 사찰이든 온 국민이 기도를 하고 촛불을 들고 빌고 또 빌었다.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안타까운 심정으로 “희생자들을 위한 기도에 동참해달라” 메시지를 전해왔다. 그걸 보고 교인들은 또 울었다.

▲ 무사귀환 기원

20일에도 여명은 바다로부터 왔다. 기다리다 지친 실종자 가족들은 괜스레 왔다갔다 하기만 하지 도움이 안되는 관계당국자들을 믿지 못하겠다고 입을 열었다. 이들은 청와대로 가서 박대통령을 직접 만나 하소연하고자 했다. 그러나 경찰이 말리고 정호원 총리가 내려와 가까스로 눈물의 행진을 막을 수 있었다.

이날 새벽 1시30분에는 그나마 조금은 숨통이 터지는 소식이 전해졌다. 마침내 객실에 진입해 시신 3구를 수습했으며 이후 수구의 시신이 더 수습됐다. 산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이 발견될 때마다 실종자 가족들은 초주검이 돼 갔다. 사고 발생 후 엿새째인 21일에도 아침부터 시신 인양이 잇따랐다. 시신이 들어온다는 소식에 부모와 가족은 상황실로 한걸음에 달려가 넋을 잃었다.
 
21일 오전 4시 30분경에는 세월호 침몰 사고 후 구조됐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안산 단원고 교감 강모 씨의 장례식이 안산 제일 장례식장에서 치러졌다.

그의 유서에는 "200명의 생사를 알 수 없는데 혼자 살기에는 힘에 벅차다. 나에게 모든 책임을 지워달라. 내가 수학여행을 추진했다. 내 몸뚱이를 불살라 침몰 지역에 뿌려 달라, 시신을 찾지 못하는 녀석들과 함께 저승에서도 선생을 할까"라며 자책하는 글이 적혀있었다. 그 글은 또 다시 가슴을 찢어놨다.
경기 안산 단원고등학교 교실의 유리창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편지와 무사 생환을 기원하는 메시지로 가득 찼다.

아무도 먹을 사람은 없지만 교실 창틀엔 빵과 음료수도 놓여 있었다. 음료수와 빵에는 "너 배고플까 봐 형이 가져왔어"라는 메모가 있었고, "너 추울까 봐 가져왔다"는 메모와 함께 보온 팩도 놓여 있었다. 선생님들이 머물던 단원고 교무실 문 앞에는 실종된 선생님을 향한 "언제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선생님 옛날 제자입니다. 어서 돌아오세요" 같은 글이 적힌 메모지로 가득했다.

이런 와중에도 익명성을 보안으로 일부 정신병자 같은 사람들이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고 또 일부 언론은 아무나 TV에 불러내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여과없이 내보내 희생자 가족들에게 또 한번 대못질을 해댔다.

지치고 지친 희생자 가족들은 이제 아이가 살아있을 것이란 기대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실낱같은 그런 희망보다 시간이 더 지체되면 시신이 유실되거나 형태를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먼저 엄습한다. 세월호에서 기름이 유출된 이후 인양된 일부 시신들이 기름 범벅이어서 더욱 가슴이 찢어져 나갔다.

7일째다. 사망자는 이날 오전 까지 104명으로 늘어났다. 시신은 건져지고 있으나 생존자 소식은 없다. 그러나 팽목항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거나 체육관 등지에 모여 있는 실종자 가족들은 구조작업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못다핀 꽃들은 이유도 없이 져가고 있다. 그래서 온 국민은 가슴이 더 찢어진다. 봄날 한때 화려하게 피었다 진 벚꽃처럼 세월의 아름다움을 맛볼 겨를도 없이 스러져 갔다. 이미 진 우리의 아이들은 차디찬 바다 저 어디쯤에서 고향을 바라보며 떠돌고 있을 것이며 다시는 그 화사한 웃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대한국민의 마음속에 지지 않는 봄꽃으로 영원히 살아 있다. 다시 봄이 오면 이들은 찬란한 벚꽃으로 우리 곁에서 다시 피어나 오히려 우리를 위로해 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기적이 우리 곁에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촛불을 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