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화양 구곡과 우암 송시열 - 우암이 8년간 은거하며 ‘기쁨 아홉 군데’ 이름 붙여 ‘구곡’
(6) 화양 구곡과 우암 송시열 - 우암이 8년간 은거하며 ‘기쁨 아홉 군데’ 이름 붙여 ‘구곡’
  • 주장환 작가
  • 승인 2014.04.22 11:5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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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천(巴串)은 신선이 흑초 넣은 막걸리 몰래 먹었다는 곳

눈 멀쩡한 길잡이들을 장님 만들 만큼 짙은 안개
계곡마다 물들은 완만하거나, 급하게 내닫고…

화양구곡(華陽九曲)은 새초롬하게 삐친 봄이었다. 나무와 꽃들은 아직 기지개를 활짝 펴진 않았지만, 저마다 풋풋한 향을 내뿜으며 봄이 진짜 왔는지 ‘간을 보는’ 중이었다. 화양구곡에 발을 디딘 아침부터 하늘은 잔뜩 낮게 깔려 내려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진경산수화풍의 낭만적 분위기까지 낳았다.

▲ 진달래 잎이 개나리의 노란 몸을 치마폭으로 담는 화양구곡의 길은 명상 길과 다름 아니다.

물안개가 까무룩 피어오른다. 그 안개는 아직 못다 핀 꽃의 정령이거나 물의 요정이 마법을 부린 것일지도 모른다. 아홉 군데 계곡에서 낮게 웅크리며 다가오는 그것은 아침을 열어 제치려는 몸부림이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위 뒤 바람따라 꽃들은 맹렬히 피어나려 애쓴다. 비단옷 같이 하늘거리는 진달래 잎이 개나리의 노란 몸을 치마폭으로 담는다. 산을 날아오다 멈춘 홍매화며 산수유 같은 꽃잎들은 물안개가 이미 안고 졌으며, 그 자리에 벚꽃이 비단결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화양구곡은 ‘발 디디는 곳마다 절경’ 이라는 속리산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이 공원은 남북을 관통하고 있는데 위로는 월악산 국립공원, 아래로는 덕유산 국립공원이 이끌거나 받쳐주고 있다. 이 공원의 머리 쪽은 괴산군인데, 청천면 화양리의 화양동계곡이 여기에 은거해 있다.

산의 온갖 미세한 음영들을 다 담은 화양동의 아홉 계곡은 화양천을 자궁처럼 안고 산 속으로 10리쯤 뻗어 있으며, 이곳 안개들은 눈이 멀쩡한 길잡이들을 장님으로 만들 만큼 짙었다. 골짜기 물들은 완만하거나, 급하게 내닫거나, 서로 안기고 혹은 줄행랑친다. 그리곤 마지막 계곡에서 대문을 닫아걸 듯이 몸을 던져 완결미를 맛보게 한다.

자연의 풍광은 그것 자체가 불러일으키는 정서나 감흥보다는 거기에 엮인 역사에 의해 더욱 빛날 때가 종종 있다. 화양구곡도 그렇다. 이곳이 더욱 유명해진 이유는 우암 송시열 때문이다. 그는 지금으로 치면 50세라 할 수 있는 60세에 이곳으로 왔다. 이때가 1666년 8월로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러나 화양동 계곡은 한여름 더위정도는 저만큼 내쳐버리는 한기를 지닌 곳이다. 아홉 계곡을 타고 든 북서 계절풍이 바위나 동굴에 틈틈이 남아 공기댐 역할을 하는 나무들을 비집고 화양천을 얼음처럼 차게 만든다.

‘살살 부는 바람에 가슴이 멍든다’ 더니, 이 날은 안개 속에 남아있던 찬 공기가 살살 부는 바람보다 더 세차게 가슴을 쥐어박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화양구곡에 들어서면 굼뜬 시간이 계곡 곳곳에 숨은 채 낭만 가득 찬 금빛 양광을 몸서리치게 안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무너져서인지도 모른다.

▲ 만동묘. 이 자리에 있던 화양계당에서 우암은 8년간 세월을 녹였다.

■ 병자호란 치욕 가슴에 묻고

우암은 지금의 만동묘 자리에 화양계당(華陽溪堂)이라는 집을 짓고, 8년간 은거했다고 한다. 만동묘는 우암의 유언에 따라,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황제 신종과 의종에게 제사지내기 위해 숙종 때 세운 사당이다. 친명파였던 우암은 민정중이 북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명의 마지막황제 의종의 ‘비례부동(非禮不動)’이란 넉 자 친필을 얻어다 주자, 1674년에 그것을 화양리에 있는 절벽에 새겨 감상했다고 한다.

우암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아마도 가슴 깊이 새겨 두었던 것 같다. 청에 대한 북벌론은 그래서 나왔겠으나 치욕을 씻고자 하는 분노는 결국 조선반도 안에서만 웅크리다 끝나고 말았다.

화양서원은 우암을 제향한 서원으로 숙종 때 사액(賜額)되었다. ‘까막배자’란 말이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지방 서원 등에서 상민의 돈을 착취할 때 먹빛 인장을 찍어 증표로 보내던 글발이다. 화양서원에서 발부한 까막배자는 그 위세가 대단하여 '화양묵패(華陽墨牌)'라는 별칭이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그나저나 화양서원의 오래된 서까래에서 나는 냄새며 돌계단은 역사의 뒤안길을 걷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해주니, 이만한 호사가 없다. 스트레스 쌓이는 현대 생활에서 숲이나, 옛 향취가 은은히 풍겨 나오는 고즈넉한 고택을 찾는 것만 한 치유법이 어디 있겠는가? 외삼문 너머로 보이는 산에는 어디선가 ‘궁노루가 산울림에 달빛타고’ 뛰쳐내려 올 듯하다.

자고로 인간은 다른 동물들이나 식물들과 겨루며 자연을 다스려 왔다. 아마도 오랜 세월 풍상을 겪어 온 화양서원의 퇴적층에도, 인간의 문화를 한겹 한겹식 추가해 준 온갖 식물이며 동물의 잔해들이 쌓여있고, 우리 인간들의 혼도 배어 있으리라.

우암은 나무껍질로 지붕을 이은 다섯 칸짜리 초당(화양계당)을 짓고 나서, 3년 뒤 금사담 건너 바위 위에 주자의 운곡정사를 본떠 별장겸 서재를 만들었는데, ‘암서재(巖棲齋)’라 불렀다.

이곳은 우암이 노년기를 보내며 제자들과 인생을 논하던 곳이다. 증자와 주자의 사상을 계승하기 위한 그의 철통같은 마음가짐은 ‘증주벽립(曾朱壁立: 증자와 주자가 벽에 서 있다. 즉, 두 분이 우뚝 서 계신 것 같이 생각하며 본받자는 의미)’이란 글 속에 잘 나타난다.

이 글은 우암의 종로구 명륜동 집터에도 새겨져 있어, 서울을 떠나기 싫은 사람들은 그곳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성싶다. 또한 제주도의 귤림서원(橘林書院) 옛터에도 있다고 하니, 제주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그곳을 찾아 자신의 줏대를 확고히 세우는 계기로 삼아봄 직하다.

▲ 운영담. 푸르다 못해 시퍼런 물이 여름이면 진녹의 나뭇잎들을 잡아먹는다.

■ 우암, 금사담에 배 띄워

전남 보길도 중리 은모래해변 방풍림을 지나 섬 끝자락 백도리까지 발을 옮기면, 우암이 시문을 썼다는 '글씐바위'가 있다. 보길도는 우암보다 고산 윤선도의 안마당이었다. 우암의 탄핵을 받아 윤선도가 유배간 땅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우암 역시 말년에 제주도로 유배가다가 이곳에 들러 시쳇말로 ‘입이 웬수다(一言胡大罪: 말 한 마디가 무슨 큰 죄라고)’라고 한탄했다.

역사 속 라이벌이었던 윤선도와 우암은 저마다 남인과 서인의 거두로 후학들의 존경을 받았고 각자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러나 비록 주자학이 주희의 몸으로 남아있기는 해도 그것을 해석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의 의견이 엇갈렸다.

화양계당과 암서재 사이의 계곡물을 금사담이라 부르는데, 그다지 폭이 넓지 않아 개구리헤엄이라도 칠 줄 안다면 헤엄쳐서 건너봄직하다. 우암은 배를 띄우고 초당과 서재를 오갔다고 한다. 산에서 강의 풍취를 누린 셈이니,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智者樂水)’를 다 갖춘 것이렸다.

우암 당시 조선은 주자를 따르는 선비들이 많아 모두들 주자의 흉내를 내고자 했다. 주자의 사상을 거의 맹목적으로 따르며, 주자의 ‘무이구곡’이나 ‘무이도가’ 등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나온 것이 ‘구곡원림’, ‘구곡시’, ‘구곡가’ 등이다. 한강 정구의 ‘무흘구곡’, 곡운 김수증의 ‘곡운구곡’ 등 구곡에 관한 것은 많다.

하여간 우암은 이런 시를 지었다.

푸른 물의 숙덕거림은 성낸 것 같으니

푸른 산의 잠잠함은 찡그리는 것 같구나

푸른 산과 물이 성내고 찡그린 것 같다니, 심사가 꽤 뒤틀린 듯하다. 메타포의 되치기라 하기엔 너무 미화하는 듯 보이고, 그렇다고 ‘씹자니’ 새카만 후학이 주제도 모르고 건들거린다고 할까봐 말을 못하겠다.

우암은 자신을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떠서 화양동계곡의 ‘기쁨 아홉 군데’에 이름을 붙이고 화양구곡(華陽九曲)이라 했다. 입구에서부터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1곡부터 9곡이 이어진다.

제1곡은 하늘을 떠받들듯 하였다는 경천벽(擎天壁)으로, 화양동 초입에서 오른쪽 계곡 건너 우뚝 서 있다. 바위들은 숲과 나무의 빈틈에서 얼굴을 보이거나 감추고 있는데, 그저 그것만으로도 의미 또는 무의미를 드러낸다. 아래쪽에 華陽洞門(화양동문)이라 쓴 우암의 글씨가 묵직하게 새겨져 있다.

제2곡은 거울처럼 맑은 물에 지나던 구름이 제 모습을 비춘다는 운영담(雲影潭)으로, 제 그림자를 물에 담은 바위들이 장승처럼 서서 여행객들을 반기는 듯하다. 사람들은 한여름에 오면 푸르다 못해 시퍼런 물이 진녹의 나뭇잎들을 잡아먹는다고 했다. 이곳 물속에는 감춤으로써 드러내 보이려는 은근함이 있다.

제3곡인 읍궁암(泣弓岩)은 계곡을 향해 퍼져 누운 너부죽한 바윗덩이다. 우암은 효종 임금을 기리며 매일 새벽과 효종의 제삿날에 이 바위에 올라 서울 쪽을 향해 엎드려 통곡했다고 한다. 구멍이 많이 보이는데, 과장스럽지만 눈물방울이 떨어져 그런가 싶다. 한말의 명유(名儒) 현화 고광선이란 분도 전라도 광주 서창면 봉황산에서 고종임금을 기리며 3년간 곡(哭)을 했는데, 그 눈물자국은 파란 이끼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거참, 사내들이 오래도 운다.

제4곡 금사담(金沙潭)은 다소 좁은 계곡이어서 안개가 더 빠지지 않고 고여 있는 듯하다. 앞서 말한 암서재가 우리 옛 건축문화를 보여주면서 정연한 코스를 길잡이 해준다. 이곳이 9곡의 허리쯤 된다. 층층암반 아래로 금빛 모래가 햇살에 반사되면, 금빛 향연이 펼쳐졌단다. 바위벽에는 ‘金沙潭(금사담)’, ‘忠孝節義’(충효절의)‘ ‘蒼梧雲斷 武夷山空(창오운단 무이산공)’ 등 여러 글자가 새겨져 있다. 창오산은 예로부터 중국에서 임금을 상징하는 산이고, 무이산은 주자가 살던 산이다. ‘창오산은 구름이 끊어지고 무이산은 비어 있다’고 한 것은 명이 스러지고 청이 득세하는 상황을 나타낸다.

▲ 와룡담 가는 길. 누워있던 용이 세월을 감고 오르려는지 하늘이 낮아져 있다.

■ 우암 사상 엿볼 수 있는 9곡

물살 타듯 거슬러 오르면 화양 3교라 이름 붙은 다리가 계곡을 가로지르다 고개를 벽에 박는다. 다리 바로 위쪽에 각이 반듯한 바위가 층층이 쌓여 높직한 대를 이루고 있다. 이곳이 제5곡 첨성대(瞻星臺)다. 그위에서 천체를 관측할 수 있어 그리 불렀다 하나 이름만 듣곤 경주에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겠다. 이곳에는 선조와 숙종의 어필로 바위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또 첨성대에서 계곡으로 내려와 약간 위쪽으로 오르면 바위벽에 앞서 말한 ‘비례부동(非禮不動)’과 우암의 글씨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情日月)’이 새겨져 있는데, 우암의 사상과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제6곡은 큰 바위가 마치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듯 우뚝하다고 해서 능운대(凌雲臺)다. 자세히 보면 무슨 사람 얼굴 같기도 하고 동물 형상 같기도 한 모습이 여럿 보인다. 구름이 변해 시시각각 다른 형상을 나타내듯 그 형상의 모습도 마음에 따라 달라 보인다. 이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했던가?

제7곡은 와룡암(臥龍岩)이다. 전국 어디에서도 와룡암이란 이름은 흔히 만날 수 있다. 용을 최고의 상징으로 여기기에 그렇겠지만 너무 흔하다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단, 우암이 쓴 ‘臥龍岩’ 서체가 진경이다. 이 부근서 제법 큼지막한 돌을 뒤집으면 통가리며 가재, 미꾸리, 피라미들이 겨울잠을 자다 화들짝 놀라 물먼지를 일으키며 달아난다.

이곳까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소풍 온 듯 흥겨우나, 낙락장송들이 무성한 제8곡 학소대(鶴巢臺)까지는 제법 숨이 차다. 계곡가에 우뚝 솟은 바위벽으로, 옛날에는 백학이 둥지를 짓고 새끼를 낳으며 솔방울을 벗 삼아 살았다고 한다.

학소대에서 제9곡 파천(巴串)까지도 요새말로 ‘장난이 아니다’. 가파른 오솔길을 각오해야 한다. 용의 비늘을 꿰어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파천이라고 한다는데, 매끄러운 바위에 물살이 몸을 비비는 곳이다. 이곳저곳 바위에 시인묵객들의 글들이 고개를 쳐들고 있다. 신선들이 몰래 숨어 홍초나 흑초 넣은 막걸리를 먹었다는데, 거짓말일 가능성이 화양계곡 물안개처럼 농후하다. 사진=운봉 최병학(자유헹복학교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