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위하고 스스로 가난해야 합니다 가장 낮은 곳에 거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지요”
“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위하고 스스로 가난해야 합니다 가장 낮은 곳에 거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지요”
  • 주장환 취재국장
  • 승인 2014.04.15 15:2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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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프란치스코 교황, 그의 종교 철학과 성찰의 삶

 
이웃에 대한 도움을 현실화시키는
정의로운 행위가 바로 기도입니다

[글=주장환 취재국장] ‘세상 끝에서 찾아낸 바티칸의 해답’,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폭발적이다. 12억 가톨릭의 수장으로서만이 아니라 이민 노동자의 아들로 교황에 오른 입지전적인 삶과 파격적인 행동 등이 신선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번 회에는 교황의 인생관과 세계관 그리고 정치,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알아본다.

우선 교황도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 이야기를 하나 해보자.

2010년 당신 아르헨티나 추기경이었던 프란체스코 교황(당시 이름은 베르고 글리오)은 아브라함 스코르카 교수(부에노스아이레스 소재 라틴 아메리칸 라비 신학대학 생물학과)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신의 첫 사랑을 이렇게 고백했다.

▲ 꽃동네 설립자인 오웅진 신부가 지난해 로마 교황청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알현하고 있다. 교황은 방한 때 이곳도 방문해 장애 어린이들도 만날 예정이다. (사진=연합뉴스)

■ 이탈리아 노동자가 그의 아버지

“빵이 있다면 갖고 싶고 먹고 싶어 한다. 신성화된 삶과 속된 삶 모두에게서 좋은 것만 취하고 싶어한다. 신학교에 다니면서도 삼촌의 결혼식에서 만난 한 여인에게 빠져 한동안 정신을 못차렸다. 1주일 내내 그녀의 얼굴이 아른거려 집으로 찾아가 만나자고 말하고 싶었다.”

베르고 글리오는 번뇌에 휩싸였다. 신학생이었기에 언제든 되돌아 갈 수있는 길이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종교인의 길을 택했다. 대단한 자기 관리다.

불교에서는 수(受)로 말미암아 애(愛)가 있다. 수의 대상을 애욕하기 때문이다. 애욕함으로써 네 가지의 취(取)가 일어난다는데 이게 걷잡을 수 없게 망아지처럼 날뛰면 인생 ‘종친다’ 했다.

젊은 시절은 자신을 다잡기 힘들다. ‘질풍 노도의 시기’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좌절과 극단적이며 정서적인 동요가 출렁인다. 투견과 같은 맹렬한 투쟁과 ‘제임스 딘’과 같은 냉소가 지난 다음에야 따스해지는 남쪽을 비로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베르고 글리오는 그 시기를 이겨냈다. 그것은 천근만근이나 되는 하늘을 떠받치는 것처럼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의 겸손하고 이타적인 행동, 청빈할 정도의 검소함, 여성과 이교도의 발을 씻어준 행적을 돌이켜 보면 그때의 ‘실연사건’(?)이 역설적으로 깊은 철학적 인류애로 승화된 것이 아닌가 한다.

베르고 글리오는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이탈리아의 노동자를 아버지로 뒀다. 그는 자라면서 총을 든 군사독재 정권이 그리고 페론주의로 대변되는 포퓰리즘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지를 체험했다. 아르헨티나는 유대교, 이슬람교, 동방 정교 등의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혼합돼 갈등이 심했다. 다종교와 다문화의 평화적 공존은 이 나라의 미래를 결정지을 결정적 변수였다.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 “아르헨티나 역사의 특징은 인종의 혼합이다. 그것은 보편성을 띠며 다른 민족의 정체성을 존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메스티소(Mestizo)’라는 단어가 ‘부’와 ‘더 나은 인종’ 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융화가 아닌 문화적 우월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황은 “국가는 자체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다른 국가와 조화롭게 동화되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교황은 이와 함께 자신의 할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베르고 글리오가 5~6세쯤 됐을 때 집앞으로 살바시온 군대(구세군)의 여성들이 지나갔다. 그는 할머니에게 “저 사람들은 수녀인가요?” 하고 물었다. 할머니는 “아니다. 저들은 개신교도란다. 하지만 좋은 사람들이지.”

교황은 자신이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 것은 할머니의 이런 ‘종교의 지혜’에서 배웠다고 회고한다. 교황의 집안은 청교도였다.

이런 견해와 연결시켜 교황은 세계화와 원리주의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견을 담담하게 제시했다. 그는 원리주의는 극단주의이며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특히 교사들이 원리주의자들일 때 학생들은 인간으로서 성찰하지 못하게 되며 자유를 빼앗기게 되고 상당한 위험에 빠져 든다고 경고했다.

교황은 또 신앙인이라면 누구든, 자신과 가족과 동족과 혹은 도시에만 믿음을 제한해서는 안 되며 다른 신앙인이든 비신앙인이든 손을 내밀려고 다가가야 한다고 당부한다.

세계화 역시 모든 것을 획일화 시키며 제국주의적인 본질에 자유주의적인 수단을 활용하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만약, 세계화를 천편일률적인 당구공처럼 생각한다면 각 문화가 갖는 풍부한 장점들은 사라지고 만다”면서 “우리가 수호해야 할 진정한 세계화는 서로 융합되면서도 각각의 특색을 유지하고 다른 문화도 번영시키는 다면체와 같아야 한다”고 갈파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은 분단된 한반도에 또 다른 희망을 실어 줄 것으로 기대된다. (그래픽=연합뉴스 제공)

■ 세계화는 他문화도 번영시키는 다면체

교황은 권력의 부패에도 아프게 반응하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경찰이 속도 위반을 하는 차를 세우고는 맨 먼저 하는 말이 “얼마에 해드릴까요?”라는 말이라면서 씁쓸해 했다. 교황은 우리는 뇌물에 약하지만 그걸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목수였던 외할아버지의 친구 이야기를 본보기로 일러주었다.

10살이 되던 해에 베르고 글리오는 1주일에 한 번씩 어떤 남자가 할아버지를 방문해 아닐린 염료를 파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두 사람은 테라스에 앉아 밝은 모습으로 담소를 나눴고 할머니는 그에게 와인을 곁들인 차를 대접하곤 했다. 궁금증을 못이긴 베르고 글리오가 그가 누구인지를 물었다. 그런데 놀라운 답이 돌아왔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부통령을 지낸 엘피디오 곤잘레스라는 것이었다.

교황은 이렇게 회상했다. “전 부통령이 외판원 생활을 하며 생계를 꾸려 가는 그 모습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직의 모습이었습니다.”

교황은 오늘날 정치에 대해서도 바구니에서 달걀을 꺼내듯 조심스레 언급했다. “우리 정치는 무엇인가 놓친 것이 있다. 정치적 아이디어들은 단지 겉보기에만 그럴 듯한 미적 아이디어로 바꿨다. 오늘날에는 정치적 제안보다 미적 이미지가 훨씬 중요하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미학과 동일시 되는 수사와 정치의 관계는 화장품과 건강의 관계와도 같다”고 말했다.

교황은 아르헨티나의 부정과 부패를 안타까워하며 본질을 미학으로 대체하고 투표와 마케팅을 신격화했다고 꼬집으며 이는 국민들에게 커다란 죄를 짓은 일이라고 부언했다.

그렇다면, 무신예찬에 대한 트윗이나 리트윗이 유신예찬보다 더 많아진(긍정적 반응이든 부정적 반응이든) 오늘날 종교인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낙태, 안락사, 동성 결혼에 관한 교리 해석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고 사제들도 이 문제를 놓고 갈등을 겪고 있다. 게다가 종교의 세속화와 고립적 현상도 ‘발등의 불’이다.

낙태에 대해 교황은 반대한다. 생존권은 인간의 첫 번째 권리이고 낙태는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누군가를 살해하는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동성결혼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이를 ‘반가치적인 인류학적 퇴보’로 규정짓고 동성결혼을 결혼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동성부부에게 자식을 입양할 권리까지 준다면 아이들이 영향을 받을 수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들에게는 정체성 형성에 도움이 되는 ‘남성 아버지’와 ‘여성 어머니’가 필요하다고 못박았다.

▲ 솔뫼성지의 예수님 상.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장 낮은 곳에 거하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이라 믿는다. (사진=연합뉴스)

■ 생존권도 인간의 첫번째 권리

안락사에 대해 교황은 ‘무익한 치료는 동의하면 안된다’고 잘라 말한다.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환자의 존엄성을 침범할 수있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적극적인 안락사’ 는 다른 문제이며 이는 살인행위와 같다고 부언한다.

그러나 자살에 대해서는 좀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한때 그는 자살한 사람들의 장례식에는 찾아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삶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에 불과하다. 하지만 ‘존중’하며, 하느님의 자비로운 손안에 맡긴다” 고 말했다.

교황의 나이도 산수(80세)를 바라본다. 노년이니 만큼 노인문제에도 남다른 관심이 있을 것 같다. 그는 노인을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이라 정의했다.

교황은 “노인은 우리에게 삶과 나라와 가족과 문화와 종교에 대한 기억을 전해 준다. 노인을 공경하면 여러분이 노인이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면서 ‘부모를 공경하라. 그러면 이 땅에서 내 생명이 길리라’는 10계명의 5번째 구절을 전해 주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가장 관심이 많은 돈에 대해서는 어떤 말씀을 주실까? 교황은 최근 바티칸 은행(IOR)의 존속을 결정했다. 돈세탁 혐의 등 불법적 밀실 운영으로 지탄을 받아온 IOR를 폐쇄하는 대신 국제적 기준에 맞게 개혁하기로 방침을 정한 것이다.

그는 바티칸 은행 돈은 나병환자들이나 학교,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공동체를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면서 정직한 돈을 좋은 곳에 사용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부정한 돈과 피묻은 돈은 절대 용납해서는 안된다고 엄격하게 말한다. 또 사유재산일망정 일정한 한도 내에서 공공을 위해 사용돼야 하며 돈에도 조국이 있으니만큼 해외로 재산을 빼돌려서는 안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교황 취임 첫 일성이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고 스스로 가난해야 한다”였다. 이는 막대한 부의 뒤에는 반드시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 교황의 믿음에서 탄곡처럼 흘러 나온 말이다. 교회를 운영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교황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렇게 들어온 기부금이 어떻게 사용되느냐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교회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반감이나 거부반응을 보이더라도 아픈 사람을 돌봐야 하고 죄인들을 면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동체안에 통합하여 기술교육을 시키고 ‘거침없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해법을 제시한다.

■ 노인은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

교황의 삶은 화려하지 않다. 하늘에도 있지 않으며 사람들 위에 있지도 않다. 그는 관용, 사랑 자비, 용서를 체화하고 가장 낮은 곳에 거하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이라고 믿는다.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도록/나를 도와주소서(하략).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성프란치스코 기도문이다. 교황의 기도는 이웃에 대한 도움을 현실화시키는 정의로운 행위이며 기도가 없다면 우리는 위선이라는 죄의 구렁텅이로 떨어져 영혼의 분열을 초래할 것이라 단언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소설 ‘성프란치스코’를 쓰면서 “굵은 눈물방울들이 종종 원고를 더럽혔으며 손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상처를 가진 채 내 앞의 허공 속에서 멈추어 버렸다”고 말했다.

이처럼 신성한 세계적 성자를 흠모하고 이름까지 프란치스코로 바꾼 교황이 앞으로 우리 인류에게 어떤 성자로 기억될 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혹시 “지나가는 이여, 멈춰서 너의 발걸음과 걷는 속도를 너의 마지막 걸음을 생각해 보라”고 말한 베르고 글리오의 할머니는 알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