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웃으로 내려 온 교황 프란치스코
내 이웃으로 내려 온 교황 프란치스코
  • 주장환 취재국장
  • 승인 2014.04.01 19: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빈민가 자주 찾아 소외된자들 위로…소탈·파격으로 "청년 예수" 떠올려
▲ 아이를 안고 파안대소 하고 있는 교황. 낮은 곳에 임하는 삶을 추구하는 그의 삶은 인류의 귀감이다. (사진=AP연합뉴스)

[신아일보=주장환 취재국장] 교황의 원래 이름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이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으로 있다가 봉임되어 교황명을 프란치스코라고 정했다.

베르골료는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탈리아 이주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살 때 사랑하는 소녀가 생겨 "결혼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건네는 조숙함도 보였고 탱고와 횔덜린의 시를 좋아했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며 화학자를 꿈꾸기도 했으며 인내와 침착함은 부족하다고 스스로 고백하기도 했다.

1958년 아르헨티나 빌라 데보토에 있는 예수회 수련원에 입회하면서 방황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칠레 예수회 학교에서도 공부했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 소재 성요셉신학교를 거쳐 1969년 사제품을 받았다. 1973년 종신 서원했으며 예수회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으로 선출돼 1979년까지 재임했다.

당시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라틴 아메리카는 해방신학이 사회참여의 한 방편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정의롭지 못한 정치, 경제, 사회적 조건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고 실천을 강조했던 기독교 신학 운동이다.

베르골료 신부 역시 해방신학의 광풍에 빠져 들었다. 그러나 그는 폭력 사용을 거부하고 보편적 원리에 충실했다. 그는 1998년 대교구장에 임명되었으며 2001년 추기경에 서임됐다.

그는 겸손하고 가난한 삶을 추구했다. 보좌주교 시절에는 은퇴사제 숙소에서 살았고, 대주교가 된 후에도 주교관이 아니라 침대가 하나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지냈다. 식복사도 두지 않고 직접 요리를 만들어 먹었다.

지하철과 버스를 주로 이용했으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도 앞서 본문에 그려진 것처럼 남달랐다.

베르골료 추기경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위험한 빈민가를 예고없이 찾아가 차를 함께 마시고, 고해성사를 하고 미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교황이 된 후에도 교황궁 대신 순례자가 머무는 '성녀 마르타의 집'을 숙소로 쓰고, 교황 십자가는 사용하던 낡은 십자가를 그대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