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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명현(己卯名賢), 문민공(文愍公) 기준(奇遵)
기묘명현(己卯名賢), 문민공(文愍公) 기준(奇遵)
  • 황미숙
  • 승인 2014.03.31 13: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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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미숙의 문명학당 <84>

<천년토록 지키자던 군신의 의는(君臣千載意),
슬프다. 하나의 외로운 무덤뿐(惆悵一孤墳).” >

기준(奇遵, 1492, 성종23~1521, 중종16)의 자는 자경(子敬), 호는 복재(服齋)ㆍ덕양(德陽), 본관 행주(幸州)이고, 시호 문민(文愍)이다. 1514년(중종 9)에 문과에 급제, 호당(湖當)에 들어갔다가 전한(典翰)ㆍ응교(應敎)를 역임하고,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온성(穩城)으로 유배가서 처형되었다. 기묘명현의 한 사람으로 시에도 능하였다. 1545년(인종 1년)에 신원(伸寃)되었다.

《기묘록》에서 기준(奇遵)이 홍문관 직소(直所)에 있다가 옥에 갇히고 매질당하여 아산(牙山)으로 귀양 갔다. 이보다 앞서 기준의 형인 형(逈)이 모친의 봉양을 위하여 고을 한 자리를 빌어서 무장(茂長)의 원님이 되었다.

이때 기준이 온성(穩城)으로 배소를 옮기게 되자, 모친을 가서 뵈려고 몸을 빼어 남쪽으로 달려가다가 하룻길도 못 가서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돌아왔는데, 뒤에 그 사실이 발각되어 아산 현감 배철중(裵鐵重)과 함께 옥에 갇혔다. 배철중이 죄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기준이 도망치다가 돌아왔다고 진술했다.

기준이 옥중에서 옷자락을 찢어서 상서했는데, 그 대략에, “신은 태어난 지 1개월이 지나서 부친을 잃고 오직 편모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처음 신이 죄를 입었을 때 어머니가 무장에 있어서 신이 귀양 간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 없이 울면서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비록 가서 뵙고 싶었으나 방법이 없었는데 마침내 온성으로 옮기게 되자 철없는 생각에 북쪽 하늘과 남쪽 땅이 서로 먼데 한번 북방으로 가면 다시 볼 길이 없고 생사도 모르고 소식조차 서로 통할 길이 없을 것 같아서 한번 얼굴이나 보고 서로 영원히 이별하려고 생각하니, 슬픈 심정을 다시 스스로 그치지 못하고 사세가 급박하여 갑자기 경망히 뛰어 나갔으나, 나가서 다시 생각하니 뒷일이 난처하므로 뉘우치고 배소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도망한 죄를 스스로 변명하기 어려우나, 단 하루 사이의 일이요 다른 뜻이 없었으며, 신이 비록 사람답지 못하지만 일찍이 사대의 반열에 있던 터인데, 어찌 끝내 망명한 사람이 되어 밝은 태양 아래에서 구차히 살려고 했겠습니까. 진정 모자지간에 참지 못하여 이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마땅히 그 죄를 받아야 할 것이나, 효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전하께서 이 하찮은 심정을 살피신다면 또한 거의 만물을 기르시는 덕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장을 때리고 배소로 돌려보냈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논의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9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한 젊은 선비 기준(奇遵)의 절명시(絶命詩)가 허균의 《학산초담》에 실려 있는데, “해 떨어져 하늘은 칠흑과도 같고(日落天如黑), 산은 깊어 골짜기가 구름과 같구나(山深谷似雲). 천년토록 지키자던 군신의 의는(君臣千載意), 슬프다. 하나의 외로운 무덤뿐(惆悵一孤墳).”라 하였다. 이시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장과 간장이 다 찢어질 정도로 비장함과 참담함이 느껴진다.

또한《해동잡록(海東雜錄)》에는 기준의 죽음과 관련한 꿈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가 하루는 궁궐에서 당직(當直)을 하다가 꿈에 국경 밖을 여행하였는데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등 고난이 너무 심하여 길가에서 시 한수를 읊조렸다고 한다.

“이역(異域)의 강산도 고국과 같은데/ 하늘 끝에서 눈물지으며 외로운 배에 기댔구나./ 검은 구름은 끝없는데 강의 관문은(河關)은 닫혔고/ 고목은 떨어져 쓸쓸한데 성곽은 텅 비었네./ 들길은 가늘게 가을 풀숲에 갈라졌고/ 인가는 아스라이 석양 속에 담겨 있네./ 만 리 길 가는 배 돌아올 삿대도 없는데/ 푸른 바다 아득하여 소식조차 그쳤어라.”하고 읊조린 후에 그는 갑자기 꿈을 깨어 당직실 벽에 그 시를 적었다.

그 후 그는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함경도 온성으로 유배를 가는 데 도중에서 보는 것이 모두 시 중의 광경이라. 그는 말을 멈추고 시를 읊으며 처절히 흐느끼니 따르던 종자(從者)들이 모두 눈물을 뿌리었다. 귀양된 곳에 이르러 얼마 있다가 사약을 받고 죽으니, 사람의 일이 미리 정해진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저서 《덕양유고(德陽遺稿)》〈육십명(六十銘)〉중에서 여름날 부채를 찾던 부산한 마음에 대해 꼬집고 있다.

“더워서 사용되는 것을 무엇 때문에 기뻐하랴(炎而用何喜)/ 서늘해서 버려지는 것을 무엇 때문에 성내랴(凉而舍何慍)/ 처한 상황에 순응하고(順所遇)/ 주어진 분수에 편안할 뿐(安厥分)”이라 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인심은 여전하다. 필요하면 찾다가도 뒷간에 다녀오면 곧 잊는다.

번잡할 만치 야단법석이다가도 불필요하면 언제 그랬냐며 돌아서는 인심에 더 이상 상처받지 않으리라 하다가도 또 못난 짓을 멈추지 못한다. 얄팍한 마음은 달라지지 않는다. 저 자신의 이익 외에는 관심도 없고, 아부만으로 사는 하루하루를 조금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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