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서울 종로 - 인왕산 그리고 서촌아, 너희는 초봄에도 예쁘구나
(4) 서울 종로 - 인왕산 그리고 서촌아, 너희는 초봄에도 예쁘구나
  • 주장환 작가
  • 승인 2014.03.25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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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묵객들의 애환이 유적처럼 묻혀있어
통인시장 등은 맛을 추억으로 버무려

 

주말 경복궁 일대는 만원이다. 컬러풀한 아웃도어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들기 때문이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은 그래서 ‘만남의 장소’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 인왕산 길, 성터의 흔적 사이로 곰팡이 냄새가 피어오른다.

 

경복궁의 서편에 자리한 인왕(仁王/불법의 수호신)산은 형형색색의 ‘사람 꽃’으로 꽃보다 먼저 봄이 와 있었다. 수송동 계곡을 올라 치마바위로 가는 산 중턱 곳곳마다 사람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경복궁 역 1,2번 출구를 나오면 쉽게 닿을 수 있는 경복궁 서측은 미로와도 같다. 재래시장이 두 개나(통인시장과 금천교시장) 있고, 끊어지는가 하면 또다시 이어지는 길들에는 온갖 역사적 사연과 명멸한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애환이 유적처럼 묻혀 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역관(譯官)·의관(醫官)·율관(律官)·산관(算官) 등 중인들이 주로 모여 살던 곳이다. 사대부가 다수 포진한 북촌과 대비해 서촌으로 불렸다. 현재의 통인동, 체부동, 옥인동, 누상동, 청운동, 효자동 등이 대표적 지역이다.

이곳을 거닐다 보면 마치 역사의 뒤안길을 거니는 듯한 느낌이 저절로 든다. 웃고 울며 지난(至難)한 삶을 이어온 옛사람들의 한을 담은 늙은 길들에는 번뜩이는 예술혼을 어쩌지 못해 자해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환쟁이, 글쟁이, 장시치들의 혼령들이 여전히 감돌고 있는 듯하다.

숨바꼭질, 딱지치기, 구슬치기, 돌치기를 하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낮은 창, 희미한 백열전구 불빛 아래 떨리는 가슴으로 사랑하던 이의 이름을 부르던 ‘그 집 앞’의 추억도 아련하게 되살아난다.

▲ 시인 이상의 집, 한국문학사의 ‘돌출’ 모더니스트인 그는 이제 통유리창 너머 환영같은 존재로 되살아나고 있다.

한국 최고의 아방가르드 시인인 이상은 아마도 이 동네 텅 빈 한낮의 적막함을 못 견뎌 ‘제비 다방’을 개업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상의 집터와 훗날 새로이 건축된 한옥은 현재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쭉 올라가다 보이는 우리은행 골목길로 들어서면 있다. 필자가 간 날은 내부 수리중이라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길에 면한 부분이 통유리창문으로 된 작은 기와집으로 아직 시멘트 냄새가 인왕산 바람결에 실려와 코끝을 자극했다.

그의 출현 자체가 한국 현대문학 사상 최고의 스캔들이라고 누군가가 평했다지만, 시대가 그를 못 좇아왔기에 그는 더욱 외로웠는지도 모르겠다. ‘어두운 식민지 시대에 돌출한 모던보이’인 그는 백구두에 봉두난발, 구레나룻, 갈색 나비넥타이 같은 예사롭지 않은 외모와 차림새로 서울 시내를 휘젓고 다녔다. 그게 반항이었든 객기였든 그 자체로 화제였다.

앞서 맡은 시멘트 냄새며 우중층한 분위기가 27세로 요절한 그의 비운의 삶을 상상하게 만든다. 인근에 이상의 조카인 시인 김광규도 살았었다고 한다.

이상의 집을 거쳐 오르는 왼편(이곳은 이른바 ‘경복궁 서쪽 걷기’ 3코스다. 이상 집터가 있는 길은 2코스)에는 시인 노천명의 집이 있다.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한 노천명이 해방 이후 기거하며 활동했던 집이다. 그녀도 필자처럼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왠지 마음이 간다. 그래서 연애시절 ‘여친’에게 보냈던 그녀의 시 한편을 떠올렸다. 참고로, 그 여친은 필자에게 목이 길고 가늘다고 말했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사슴’ 전문

그녀의 죽음도 이상처럼 한 시기 우리 문단을 주옥같은 글로 격상시켰던 업적을 상기하면 참으로 초라하다. 1957년 3월에 그녀는 재생불능성 뇌빈혈로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했는데 입원비 때문에 궁지에 몰린 상태였고, 얼마 후엔 퇴원했으나 그 후 병세가 악화되어 이 집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이때 그녀의 나이 45세였으니, 이 또한 요절이다. 마치 바람이 그치고 나뭇가지가 잔잔해져 세상이 고요해지면 거기에 진실이 드러나듯이 그녀의 죽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지를 맛보게 해준다.

청전 이상범 가옥 및 화실도 지근거리다. 그의 집은 우리 전통 한옥으로, 1930년대에 지었다고 하니 상당히 오래됐건만 손때가 묻은 채로 잘 보존돼 있었다. 청전화숙(靑田畵塾)으로 불리는 화실은 고서, 붓, 종지들이며 청전의 사진들이 담긴 액자들이 남아있어 아직도 청전의 내음이 그대로 배어있는 듯하다. 행랑채며 대청 등은 어찌 그리 정겨운지 우리 옛집을 떠올리게 하면서 문득 돌아가신 할머니며, 할아버지, 어머니를 생각나게 했다. 청전은 사망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붓을 친구삼아 대작을 남겼다. 전통 산수화의 맥을 이으면서도 한국의 산천을 독자적인 화풍으로 그려내 향토색 짙은 작품을 선보였다는 것이 화단의 평이다.

2코스 골목길을 이리저리 배회하다 보면, 60년이나 된 대오서점이란 고서점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 역시 외견이며 낡은 책들이 추억을 붙잡아 매게 해준다. 조금 올라가면 사람들이 웅성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화가 박노수의 가옥이다. 붉고 누런 벽돌이 중하단을 이루고 있으며 확연한 우리나라의 정서를 담고 있는 가옥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서양식도 아니다. 중국 상하이나 대만 어디에선가 본 듯한 절충식이다. 친일파 윤덕영이 자신의 딸과 사위에게 주려고 지었던 것으로, 집터의 뒤쪽에는 추사 김정희가 당시 문인들과 모여서 풍류를 즐기던 송석원을 음각으로 새긴 바위도 있다. 정원 뒤편을 돌아가다 보면 만나는 가파른 고샅같은 산책로도 꽤 탐이 난다.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인왕산에서 구름 그림자가 내려온다. 자전거를 몰고 내려오다가 아차차! 앞서 오던 봉고차와 부딪칠 뻔한 소녀의 양볼이 빨갛다. 발길을 재촉하며 걷다보니 윤동주의 하숙집터가 보이고 아래 골목길 한참 가면 이중섭 가옥을 만날 수 있다. 배화여고 본관 뒤뜰에는 백사 이항복 집터 '필운대(弼雲臺)'가 시간의 암석 위에 새겨져 있다. '필운'은 이항복의 호 가운데 하나이다. 글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우리 선조 예 살던 곳 후손이 찾았더니, 푸른 솔 바위벽에 흰 구름 깊었어라. 끼치신 유풍 백년토록 다함없어, 옛 어르신들 의관은 오늘도 예와 같네(我祖舊居後裔尋, 蒼松石壁白雲深. 遺風不盡百年久, 父老衣冠古亦今).”

이항복의 경지를 되짚어 보니 해인삼매처럼 아득하다. 마음의 바다에서 이는 번뇌를 무량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으로 던져버리는 글발에 허허로운 마음이 낙엽처럼 떨어진다.

그러나 이곳은 찾기가 쉽지 않았다. 몇 번이나 물은 끝에 간신히 찾았지만, 그 스산함과 초라함은 인걸보다 먼저 나를 맞이해 ‘고역금(古亦今)’이란 글귀가 엇박자로 놀았다. 발품 팔기에 부지런한 사람은 가까이 있는 사직단도 한 번 걸음해볼 만하다.

계속 가옥 소개를 하다 보니 지겨운 면이 없잖다. 그러니 이쯤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 보자. 이 일대를 돌면서 문득 생각난 것이, 이상의 집이나 노천명의 집, 윤동주 하숙집터 등과 같은 곳들의 문화적 가치다. 꼭 국가 지정·등록 문화재가 아니더라도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얻으려면 원형성 보존과 유지가 필수인데, 그런 면에서는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보기가 어딘가 미흡한 부분이 있어 보였다. 게다가 단지 그들이 얼마간 기거했다는 사실만으로 관광객을 지속적으로 끌어 모으기는 어려울 것 아니겠는가? 단순한 스토리텔링만으로는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을 수 없었다. 다행히 세종마을가꾸기회와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추진하고 있어 기대해 봄직하다.

▲ 인왕산 치마바위. 바위 왼편 어느 곳에 주름이 진 듯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물흔적이 보였다. 전설대로 라면 중종의 부인 단경왕후의 치마가 엄청 커야 했다.

발길을 돌려 수송동 계곡으로 오른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 계곡입구에 다다르면, 압도할 듯한 암반이 뚝 버티고 있다. 치마바위다. 이 바위는 중종의 첫 번째 왕비인 단경왕후와 관련된 전설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자세한 관련 내용은 인터넷 검색을 추천한다.

이 계곡의 첫 걸음에서 겸제 정선의 그림을 만날 수 있다. 조선의 금수강산을 붓끝에서 완성한 그가 그린 그림을 안내판에다 옮겨 놓았는데, 지금의 수송동 계곡의 모습과 똑같다. ‘임난 후 진경을 절묘하게 묘사한 산수화의 수요가 폭증했는데, 왕을 비롯한 궁중 사람들이나 여행할 처지가 못 되는 사람들이 수요자였다. 그러한 문화계의 흐름 속에서, 진경산수화의 화법을 완성한 화가 중의 화가가 바로 겸재 정선이었다’고 서울대학교 규장각 관장을 역임한 정옥자 교수는 평하고 있다.

안평대군의 옛집을 ‘수성궁’이라고도 했는데, 조선시대 작가미상의 소설 <운영전>(<수성궁 몽유록>또는 <유영전>이라고도 불림)의 무대이기도 하다.

「수성궁은 안평대군의 옛집으로 장안성 서쪽 인왕산 아래에 있는지라, 산천이 수려하여 용이 서리고 범이 일어나 앉은 듯하며, 사직이 그 남에 있고 경복궁이 그 동에 있었다.
(중략)동쪽을 바라보면 궁궐이 아득하여 구름 사이에 은영하고 상서의 구름과 맑은 안개가 항상 둘러 있어 아침 저녁으로 고운 자태를 자랑하니 짐짓 이른바 별유천지 승지였다.」고 <운영전>에 적혀있다.

이곳에 안평대군이 살던 ‘비해당’ 집터가 있었다. 1442년 6월 어느 날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준수방 서북쪽 옥류동 물길 상류 수성동 계곡에 집을 지은 다음 경복궁에 들어가니, 아버지 세종이 ‘비해당’ 이라는 당호를 내려 주었다고 한다.

한 걸음 떼어 들쭉날쭉한 산길에, 새로 복원한 기린교가 보인다. 아래쪽으로 흐르는 물살을 내려다보며 건너는 사람들의 등판이 되어준 그 다리는 스스로의 존재감에 우쭐할 만했다. 길을 따라 중간 쯤 올라가다 보면 청계천 발원지가 보이고, 바로 이어 오르면 북악스카이웨이 길이 나타난다. 계속 오르다 보면 석굴암을 산중턱에서 만날 수 있고, 정상에서는 눈이 부셔 서울의 동서남북을 한눈에 모두 담기 어렵다.

북악스카이웨이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쭉 가다보면, 청와대며 경복궁, 서울시청 등 서울 시내를 안마당처럼 느낄 수 있다. 바로 내려가면 삼거리 막바지에서 윤동주문학관을 만난다. 그 바로 맞은편에는 청와대 습격사건(1968년 1월 21일에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부대원들이 침투한 사건) 때 전사한 최규식 종로경찰서장 동상이 서 있는데 비장함이 윤동주의 저항정신과 함께 묻어오는 듯하다.

▲ 윤동주 문학관. 후쿠오카형무소로 끌려가던 뒷모습을 닮은 ‘닫힌 우물’에서 사람들은 괜히 서성거렸다.

윤동주 문학관은 가벼운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마무리하기에 좋은 쉼터다. 이 자리는 원래 청운동 일대 수돗물을 공급하는 가압장이었으나, 여성 건축가 이소진씨가 손질하여 민족시인의 삶과 문학을 오롯이 녹아냈다고 한다. 건축물로 은유와 세월을 덧대어 오늘날 우리에게 공간의 벽을 공유하게 해줬다면, 윤동주를 통한 콘텐츠가 성공한 듯 보인다.

윤동주 문학관을 지나 길을 건너면, 인조반정의 서릿발이 서려있는 창의문으로 해서 북악산에 오를 수 있다. 상당한 난코스이니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 군사 통제선인 이 길을 넘어서 무조건 따라가 보면 혜화문에 이를 수 있다.

부암동사무소를 왼쪽 옆에 끼고 돌아 골목길로 올라가다 보면 ‘무계정사길’이라는 이정표가 보이는데, 무계정사 1길에 세종의 아들인 안평대군의 별장인 ‘무계정사 터’가 있다. 1447년 어느 봄날 꿈속에서 무릉도원을 보고 안견에게 그리게 했는데 바로 ‘몽유도원도’다. 꿈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36세에 독배를 받아 마셔야 했던 안평대군은 인생의 무상함을 그런 식으로 미리 맛봤던 것일까?

이 지역은 수주 변영로의 가옥터, 효자동의 어원이 된 쌍홍문이 있던 쌍홍문터, 옥인동 윤씨가옥, 활터인 백호정, 우당 이회영선생 기념관, 화가 천경자 옛집, 보안여관 등 미처 소개하지 못한 곳이 많다.

우리민족의 최고 영웅인 세종대왕께서도 이곳에서 나셨다. 이 지역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세종마을가꾸기회(회장 조기태)에서는 종로구 통인동, 옥인동 일대(한양 북부 준수방)인 이곳을 세종마을로 개칭하고 여러 가지 행사를 해오고 있다.

세종대왕은 1397년 5월 15일 이곳에서 탄생했으나, 작은 표지석 하나만 있는 실정이다. 조회장은 세종대왕의 탄생지인 이곳에 변변한 기념관 하나 없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또 이 지역 주민들이 오랫동안 피해를 입어 왔다면서, 급작스런 도심관광지로 부각되는 것도 조금은 부담스럽다고도 한다. “어떤 골목에는 카페만 주욱 늘어서 있어요. 일부 주민들은 외지인들이 우리를 원숭이 보듯 구경거리로 보는 게 기분이 좋지는 않다고 말하기도 하죠. 최근에 사람들이 몰리니까 외지인들이 와서 부동산가격을 올려놓기도 하구요.”

조회장은 그러나 어쨌든 이 지역 발전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면서, 겸제 정선의 인곡정사를 제대로 건립해 볼 생각이라고 말한다. 부지로는 자수궁 터(군인아파트 일대)를 꼽았다.
자수궁은 태조의 7번째 왕자인 무안군의 집을 선왕의 후궁들 처소로 사용하려고 문종의 지시로 만든 궁이다. 무안군이 조선 최초의 세자인 의안군 방석과 함께 역적으로 몰려 죽게 되자 그의 집이 몰수되어 나라 소유로 되었던 것인데, 문종 때 자수궁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들려야 할 곳이 통인시장과 금천교시장이다. 원래 금천교 시장이 더 붐볐으나 요즘 들어 통인시장도 만만치 않다. 특히 존 케리 미 국무부 장관이 간장과 고추가루 양념을 한 통인시장의 기름 떡볶이 집을 다녀간 이후로는 멀리 제주에서까지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케리 장관이 다녀간 떡볶이집 주인 정월선 할머니(69세)는 인터뷰에 이골이 났는지 묻는 말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덧붙여 척척 답한다.
원래 성김 주한 미 대사는 어렸을 때 자신이 찾았던 추억을 생각하여 케리 장관을 바로 아랫집으로 안내했었지만, 그날 준비한 떡이 모두 동이 난 후라서 대신 이 집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운은 하늘이 주시나 보다. 통인시장의 떡볶이는 시장 너머로 시간을 묶고 그 맛을 추억으로 버무려주고 있었다.
 

▲ 통인시장. 케리 미국무장관이 먹은 떡볶이 집은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 보통 인내심으론 먹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