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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명현(己卯名賢), 문의공(文毅公) 김식(金湜)
기묘명현(己卯名賢), 문의공(文毅公) 김식(金湜)
  • 황미숙
  • 승인 2014.03.17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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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미숙의 문명학당 <82>

<군신의 의리 천년을 가는 것(君臣千載義),
외로운 무덤을 어디메에 둘거나(何處有孤墳)>

김식(金湜)은 (1482, 성종13∼1520, 중종 15)의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노천(老泉), 호는 사서(沙西)·동천(東泉) 또는 정우당(淨友堂). 아버지는 생원 숙필(叔弼)이며, 어머니는 사천 목씨(泗川目氏)이다.

1519년 4월 조광조·김정(金淨) 등 사림파의 건의로 실시된 현량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당시 현량과의 천거 명목에는 성품·기국·재능·학식·행실·행적·생활 태도 또는 현실 대응 의식 등의 일곱 가지가 있었다. 그런데 급제자 28인 가운데 유일하게 7개 항목에서 모두 완벽하게 평가받았다. 이때에 상이 근정전에 나아가 천거된 선비들을 직접 책문(策問)하였는데, 봉내(封內)를 뜯어 이름을 부르자 상이 매우 기뻐하였다. 정원에 하교하기를, “옛 사람이 이르기를, ‘많고 많은 훌륭한 선비여, 문왕(文王)이 그로 인해 편안하도다.’ 하였다. 지금 내가 목마른 듯이 현량을 구하는 때에 아름다운 선비를 많이 얻어 조정에 늘어세우게 되었으니, 이는 국가의 복이다. 김식 같은 자는 실로 사유(師儒)로 적합한 사람인데도 출신하지 않은 것에 구애되어 서용하지 못했었는데, 지금 장원을 차지하였다. 그 아래도 모두 한때의 아름다운 선비이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하고, 마침내 김식을 사성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그는 급제자 발표 닷 새 만에 성균관사성이 되었고, 며칠 뒤에는 홍문관직제학에 올랐다. 그것은 현량과 실시로부터 겨우 보름 사이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조판서 신상(申?)과 우의정 안당은 이에 만족하지 못해 대사성에 추천했으나 중종은 이들의 주청을 물리치고 홍문관부제학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신상과 안당의 거듭된 상계(上啓)로 마침내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해동잡록》에 의하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절도안치의 처벌이 내려졌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비호로 선산(善山)에 유배되었다. 뒤따라 일어난 신사무옥에 연좌되어 12월에 죄를 더한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언덕에서 타는 불이 사면에서 닥쳐오니, 장차 집과 모든 것이 다 타버리고 말 것이로다.” 하였다. 마침 곁에 있던 손님이 말하기를, “간사한 자들의 하는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흉악한 자들의 불측한 모의가 있을 때에는 몸을 아끼지 않고 달려가 임금의 큰 은혜를 갚으려는 것이 나의 평소의 소원이었는데.” 하며 손님과 함께 마음껏 마시고 심히 취하였다. 손님이 이신에게 말하기를, “어찌 차마 앉아서 간사한 자의 손에 죄 없이 죽는 것을 보고만 있겠는가. 몰래 업고 도망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리저리 몸을 피할 길을 찾다가 간신히 무주(茂朱)에 이르러 오희안도 잡혔다는 말을 듣고 몸둘 곳이 없어 산골짜기를 경유하여 지리산으로 가려고 거창(居昌) 고제원(高梯院)에 이르러 바위 위에서 절구 한 수를 지었는데, “해는 저물어 하늘은 어둑어둑(日暮天含黑)/ 산은 비고 절은 구름 속에 가리웠네( 山空寺入雲)./ 군신의 의리 천년을 가는 것(君臣千載義)/ 외로운 무덤을 어디메에 둘거나(何處有孤墳)”하였다. 이것은 그가 목숨을 끊는 마지막 글이 되었다.

《설학소문(雪壑?聞)》에서 말하기를, 김식이 조광조와 더불어 한 마음으로 서로 도와서 기필코 지치(至治)를 실현하려고 하였으니, 장하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북문(北門)이 밤에 열려서 불측한 사태가 일어나 여러 현인이 모두 머리를 나란히 하고 체포되었는데 죽음 보기를 돌아가는 것처럼 여겼으나 유독 김식이 몸을 감춘 것은, 그의 뜻이 이는 간신들의 농간이요 우리 임금이 본심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고치기를 기대한 것이니, 그 마음이 애달프다. 그러나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이와 같아서는 부당하다. 마침내 기묘 인물의 수치가 되었으니, 애석하다고 하였다.

김식은 현량과의 천거 명목의 성품·기국·재능·학식·행실·행적·생활 태도 또는 현실 대응 의식 등의 일곱 가지 항목에 완벽한 평가를 받았으며, 당시 사림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얻고 있었고, 또 중앙에 이미 진출해 있던 사림파 중에서도 조광조에 버금갈만한 인물로 평가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찌 그가 망명하여 인가(人家)에 숨어 있으면서 피신하는 하고자 하다가 기묘 인물의 수치가 되었을까싶다. 《축수편(逐睡篇)》에서 다만 그의 성품이 조급하고 과격했다고도 하니 연유가 없지는 않다.

그의 비석이 오랜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다가 근래 후손들이 발굴하여 남양주 땅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도학 정치를 행하려던 필부의 도량을 지금 우리는 알 수 없다. 평생 배우고자 했고, 세우려고 했던 뜻이 어디에 있는가? 선비다운 생을 마감했다 하겠는가? 그 뜻을 실천 할 수 없음이 슬프다. 백면서생의 분수를 지키는 일이 무엇인지 다시금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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