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전북 부안 - 조선낭만의 꽃, 이매창의 사랑과 정의(情誼)가 흩날리는 땅
(3) 전북 부안 - 조선낭만의 꽃, 이매창의 사랑과 정의(情誼)가 흩날리는 땅
  • 주장환 작가
  • 승인 2014.03.11 17:17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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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경과의 사랑, 허균과의 우정이 서린 개암사 그리고 채석강, 적벽강
▲ 채석강은 연인들이 데이트하기에 좋다. 파도소리에 여인들이 마음을 잘 빼앗기기 때문이다.

채석강(彩石江) 석절편(石切片) 아래 따개비 낀 너럭바위의 편편한 마음쓰임이 몹시 고와 보였다. 세상 잡사를 그 위에 놓고 있으면 모든 게 사라질 듯했다. 부스러질 듯 가벼운 모래가 굳어지며 영겁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왔을 그 편마암 바위들은 알몸으로 중국대륙을 건너온 북풍한설을 기세 좋게 받아내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날아왔는지 텃갈매기 한 마리가 석절편 절벽 겨우 남은 나무등걸 위에 날개를 움츠리고 앉았다.

바닷바람을 마음껏 맞으며 서있는데,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날씨가 좋으면 위도까지도 다 잘 보여요.”

“위도요?”

“거 방폐장으로 유명한 곳 말씀이에요.”

그랬다. 그 바닷바람은 위도와 식도에서 날아왔다. 그러고 보니 그 바람 속에는 위도 방폐장 문제를 둘러싼 감정의 골이 아직도 남아있는 듯 했다. 매창과 함께 이곳을 여행하며 사랑을 속삭였을 허균은 400년이 더 지난 뒤에 일어날 핵폐기물 사건을 어디 짐작이나 했을까?

허균의 <홍길동전>에 나오는 이상국인 율도국(栗島國)은 위도가 모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위도를 소개하는 책자들이나 격포항과 위도 파장금항을 운행하는 카페리 선실에도 위도를 홍길동전에 나오는 율도국이라고 선전하는 문구가 있다.

그러나 이는 사료적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 각 지자체들이 관광객 유치를 위해 무차별 홍보하는 건 위험한 발상으로 보인다.

채석강은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뱃놀이 흥취에 겨워 강물에 떠있는 달그림자를 잡으려다 빠져 죽은 중국의 채석강과 흡사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만큼 아름답다는 이야기겠다. 파도가 만든 해식동굴과 바닷물에 깎인 퇴적층은 장관이다. 거대한 층리를 이루며 겹겹이 쌓이고, 구불구불 휘어진 단애를 보노라면 말 그대로 돌에 색을 칠한 듯하다.

하지만 채석강은 강이 아니라 해안절벽이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자꾸 헷갈려 한다. 또 헷갈리는 것이 있다. 바로 적벽강(赤壁江)이다. 이 역시 중국의 적벽강만큼 경치가 뛰어나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용두산을 돌아 절벽과 암반으로 펼쳐지는 해안선 약 2km를 말한다.

어쨌든 채석강과 적벽강 주변은 이제 모텔과 여관, 노래방과 각종 음식점 등으로 인해 위락화돼 어정쩡한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사람이나 동물, 나무, 건물 등이 자연속의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을 자기 위주로 만들어 가는 그런 작위성은 현기증만 낳을 뿐이었다. 뽕짝조의 유행가 곡조가 해변 전체를 뒤흔들어 놓고 있는 그런 정경은 중생대 백악기의 지층과는 전혀 어우러지지 못한 채 겉돌고 있었다.

▲ 채석강에서 바다를 등지고 선 여인들의 모습에서 봄내음이 묻어난다

앞서 지나쳐 왔던 서외리 매창의 무덤에서는 참새 몇 마리가 포릉포릉 날며 부산을 떨고 있었다. 그 새들의 지저귐 속에는 마치 토해낼 수조차 없는 매창의 아픔이 배어 있는 듯했다.

매창의 무덤으로 조성한 공원 내에는, 근세 여류명창 이화중선의 여동생이었던 이중선 명창의 묘도 있었다. 가지가 얼마 남지 않은 붙박이 나무들이 바람 소리에 몸을 떨고 있었는데, 참으로 기묘한 조합이었다. 애절한 가락과 육자배기로 피곤한 사람들의 한과 설움을 달래주었다는 이중선이고 보면, 400여년 전 한 여인의 애달픈 사랑노래가 호곡소리처럼 떨어지지 않고 진득하게 늘어붙을 만도 했다.

어스름한 해가 보였다. 3월 초순의 오전 해 치고는 기운이 없었다. 옆으로 길게 늘어진 구름을 등위에 지고 어슴푸레 떠있는 모습이 더 처연했다. 매창은 이른 초봄 해를 바라보며 10여 년 묵은 이별의 그리움을 어찌 토해냈을까? 매창이 사랑하는 사람 유희경을 떠나보내고 쓴 시를 읊어보며 짐작해 보았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梨花雨

매창이 이렇듯 사모하는 마음을 끊지 못했으나 떠난 님의 소식을 10여년 간 꿈결에만 듣다 잠깐 만나고 죽었다. 이를 애통해 한 부안의 율객(시조를 잘 짓거나 창을 잘 하는 사람) 모임인 부풍율회(扶風律會)는 해마다 음력 4월 5일 매창묘소에 모여 매창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텃비둘기가 바람을 못 이기고 낮게 비행하며 용굴 속으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매창이 그 옛날 그리운 님과 함께 거닐던 채석강이며 개암사의 추억은 이제 변산반도를 휘감으며 관광객들의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인간의 상상력은 형체가 없는 존재들에게 생기를 불어넣거나 지각된 사물에 들어가 살아나게 만든다. 그래서 그런지 전라북도 부안 곳곳에는 매창의 이야기가 피어나 있었다. 게다가 시조시인 이병기, 소설가 정비석, 시인 김민성 등이 매창에 헌시를 남기며 부안의 상징으로 확실하게 부각시켜 놓았다. 이 고장 출신의 시인 신석정은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가리켜 부안삼절(扶安三絶)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직소폭포대신 채석강을 꼽고 싶다.

매창은 10세 때 이미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녀의 삶 전반에 걸쳐 그녀의 시 주제는 님과 그리움, 사랑, 눈물 등이었다. 그녀의 시들을 살펴보면 임을 떠나보내고 그리워하는 마음과 이별의 슬픔이 가득 차있다. 물론 매창의 시에는 꿈을 노래한 작품들도 보이는데, 꿈을 통해 자기실현의 욕구와 고독을 분출해 냈다. 매창은 유희경, 허균 등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승화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것같다.

 

▲ 개암사 담벼락 멀리 울금바위가 보인다. 원효대사와 백제부흥의 전설이 서려 있다.

능가산 자궁터에 있는 개암사로 가는 길은 잿빛 오솔길이 스산함을 더 해줬다. 절 뒤쪽에 가운데가 잘라진 큰 바위를 지고 있는 개암사는 백제무왕 35년(634년)에 묘련대사가 궁전에 절을 지으며 동쪽의 궁전을 묘암사, 서쪽의 궁전을 개암사라 하여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단청의 색이 방금 칠한 듯 살아나는 대웅전에서 사람들은 합장하고 돌아섰다. 좌측에 보이는 산신전이 유난했다. 같이 간 자유행복학교 윤진평 교장선생은 산신전이 대웅전 바로 옆에 자리한 것은 드물게 보는 일이라고 평했다. 응진전 뒤로 난 산길을 따라 20여분 정도 거리에는 울금바위가 있다. 울금바위에는 신라시대 원효스님이 수도하여 원효방이라 불리우는 동굴과 백제 부흥을 이끌던 복신이 머물렀다는 복신굴도 있다. 이곳 개암사에서는 <매창집>을 간행해 매창의 아름다운 시를 널리 알리는데 도움을 줬다.

여행객들 사이에서 유희경이 매창을 ‘꼬시던 시’가 화제가 됐다. 경북 봉화에서 99칸짜리 고택을 지키는 백천 선생이 매창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유희경이 매창을 만나 던진 시 ‘증계량(贈癸娘/계랑은 매창의 호)’을 설명하면서 ‘꼬시던 글’ 이라고 말하자, 서로 보고자 다툼을 벌였다.

유희경은 남도를 여행하며 다니던 어느 날 부안에 들른다. 그는 당시 명승고적을 찾아다니며 자연을 즐겼다. 노잣돈이 궁하면 일찍이 남언경으로부터 배운 상례(喪禮)를 적절하게 써먹으면 그만이었다. 필자는 두 사람이 만난 당시 장면을 상상력을 더해 소설식으로 구성해 풀어 보았다

⌜매창은 화묵청을 들어 눈썹을 정성껏 그려 나갔다. 아미(蛾眉)는 고풍을 자아냈으며, 가볍게 날아오른 콧등은 봄볕에 드는 나비처럼 화사했다. 목화꽃을 태운 꽃재를 참기름에 재운 화묵청은 그녀가 방물장수 할미에게 어렵사리 구해 간직해 오던 것이다.

매창은 종종 걸음으로 관아로 향했다. ‘풍월향도(風月香徒)’로 잘 알려진 유희경이 왔다고 했다. 이는 당시 노비들의 문학모임으로 백대붕과 유희경이 중심이 되어 움직이는 단체였다. 매창이 들어서자 그녀의 눈에 바로 들어오는 사내가 있었다. 그도 매창을 바라보는데 단박에 마음을 빼앗긴 듯 했다.

서로 소개가 끝나자, 술이 한 순배 돌고 매창이 자리를 고쳐 앉아 거문고를 잡았다. 슬렁슬렁 거문고가 울기 시작한다. 매창의 종달새같은 목소리가 흰 치아사이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붉기가 해당화같은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요염기가 더했다. 쪽진 머리카락이 몇 올 흘러내려 세모시 사이 하이얀 목덜미에 운치있게 걸려있다. 거문고 가락이 노랫가락을 받쳐 주는데 마치 여물게 익은 가을 벼 이삭에 바람이 이는듯 하다.

“두두당 둥당 둥당당 두당-”

마침내 흥취를 못이긴 유희경이 일필휘지로 써내려 갔다.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글재주 노래 솜씨 서울에까지 울렸어라

오늘에사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하여라. -증계량(贈癸娘)

매창이 노래를 하다말고 문득 멈췄다. 아귀가 척척 맞아 떨어지는 시에 감동한 매창의 마음은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자신을 알아주는 당대 향도의 글에 요동쳤다. 거문고 나무결이 잠시 햇살에 반사되어 수정처럼 반짝인다. 매창이 잠시 눈을 찌푸리는 사이, 유희경의 손이 슬그머니 매창의 섬섬옥수를 잡았다. 거문고의 여음이 아직도 감돌고 있는 가운데 유희경은 매창의 속곳을 벗겨 냈다.⌟

이때 매창은 19세에서 막 20세로 접어드는 시기였고 유희경은 48세였다고 한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격렬한 사랑을 나눴다. 그러나 유희경은 한양으로 올라가고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다. 이들의 재회는 기약이 없게 되었다. 유희경은 전쟁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는 등 바쁜 통에 매창을 다시 만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 매창공원 묘지 앞에서 비문을 판독(?)하는 여행객들. 주장이 난분분하다.

한편, 허균은 1601년 6월 해운판관이 되어 7월 하순에 호남으로 내려갔다. 부안땅에 들어서자 폭풍우같은 비가 앞을 가로막았다. 허균은 할 수 없이 객사에 머물렀다. 내리는 비를 원망하며 하늘을 쳐다보는데, 대대로 부안에서 살면서 덕행과 학문이 높은 고홍달이 찾아와서 술자리가 벌어졌다. 자연스레 매창도 어울리게 됐다.

매창은 허균을 만나면서 유희경에 대한 연모의 마음을 어느 정도 잠재울 길이 생겼다. 귀동냥으로 들은 적이 있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 허균이 아닌가? 시문을 통해 삶의 향취를 다독거려가는 그녀로서는 이만한 대화상대가 없었다.

허균 역시 매창이 기녀이긴 해도, 시에 능하고 노래와 거문고를 잘할 뿐 아니라, 절개가 곧아서(매화는 가시가 첫마디에 돋을 만큼 곧다고 동행한 백천거사께서 알려 주었다.) 색을 좋아하지 않는 점을 높게 샀다.

허균은 매창의 재주를 사랑했다. 허균은 자신의 글에, 두 사람은 정의(情誼)가 깊고 막역하여 농을 할 정도로 서로 터놓고 이야기 했지만 지나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오래도록 우정이 가시지 아니하였다고 쓴 바 있다.

허균은 같은 해 12월 형조정랑이 되어 서울로 올라갔다. 매창은 자신이 평생 그리워했던 유희경과는 1607년에 다시 만났다고 한다. 1590년 처음 만났으니, 17년만의 재회였던 셈이다. 이는 매창이 죽기 1년 전이라 하나 이설도 있다.

매창이 죽자 뒤늦게 이를 안 유희경은 “정미(丁未: 1607년)에 다행히도 다시 만나 즐겼는데 이제는 슬픈 눈물 옷을 함빡 적시누나” 하며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허균은 애도시 두 편을 지었다. 그 중 하나가 ‘계량(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라는 시다.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 밝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 무리를 두고 떠났네 (하략)

매창과 유희경, 매창과 허균이 서로 주고받은 시는 <매창집>에 잘 수록돼 있다. 58편의 작품을 모아 개암사에서 펴냈다.

부안은 그저 한적한 소도시가 아니었다. 개발 붐이 일고 있었고, 군산으로 이어지는 새만금방조제는 변산반도를 품고 있는 이 지역의 성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변산해수욕장 개발이 한창인가 하면, 새만금 방조제에는 관광객을 유인할 문화광장 및 갖가지 조형물 설치가 한창이었다. 차를 타고 스치듯 지나가며 보아 정확히는 못 보았지만, 이스터섬의 석조상 같은 형상물도 한창 건조 중이었다.

토속음식도 관광상품으로 대변신하는 중이었다. 백합죽과 바지락죽 그리고 우리밀 바지락전 등이 그것이다. 부안으로 간다면 백합죽은 꼭 먹어봐야 할 별미라고 들었건만 먹어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있다.

부안가는 길과 이 지역 세부 안내사항은 인터넷에서 쉽게 검색할 수 있으니, 스마트폰 들고 찾아가는 게 더 편할 듯하다.

 

/취재도움 부안=김선용 기자 사진=최병학 자유행복학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