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명현(己卯名賢),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기묘명현(己卯名賢),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 황미숙
  • 승인 2014.03.10 13: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황미숙의 문명학당 <81>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시니(白日臨下土),
내 일 편 단심 충심을 밝게 비추리(昭昭照丹衷).>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菴), 한성 출생, 개국공신 온(溫)의 5대 손이며, 육(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충손(衷孫)이고, 아버지는 감찰 원강(元綱)이다.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의(誼)의 딸이다.

진사에 장원하고 을해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기묘년(1519)에 능성(綾城)으로 귀양 갔다가 사사(賜死)되니, 나이 38세였다.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고 문묘에 종사했다. 공의 부친 원강(元綱)이 어천 찰방으로 있을 때,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희천(熙川)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었을 때 배웠다.

《척언》에서 이르기를 회령(會寧) 성 밑에 살고 있던 야인(野人, 여진족) 속고내(速古乃)가 가만히 먼 곳 야인과 공모)하고 갑산부에 들어와서 백성과 가축을 많이 노략해 갔다. 무인년에 남도공사(南道共使)가 밀계하기를, “속고내가 갑산 근처에 잠입하여 어렵(漁獵)하면서 왕래하나 무리가 많아서 잡기 어렵습니다. 불시에 군사를 풀어 덮쳐잡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3공과 병조와 변경(邊境) 일을 아는 재상을 불러서 논의하니, 모두 아뢰기를, “이것을 징계하지 아니하면 성 밑에 살고 있는 야인들도 잇달아 반란할 것입니다. 중신(重臣)을 보내어 감사ㆍ병사(兵使)와 함께 적을 잡아서 법대로 처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먼저 비밀 교지로써 본도(本道)에 알리고, 또 병기ㆍ갑옷ㆍ기계 따위를 보내야 합니다.” 하였다.

이때에 조광조는 “이번 일은 바로 도둑과 같은 짓입니다. 기미를 엿보는 간사한 꾀는 왕자(王者)가 오랑캐를 제어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또한 당당한 큰 나라에서 요망한 오랑캐를 잡기 위해 도적과 같은 꾀를 행해서 나라를 욕되게 하고 위엄을 손상하는 일을 신은 적이 부끄러워합니다.” 하니, 임금이 곧 다시 논의하도록 명하였다. 좌우에서 “병가에는 기병(奇兵)과 정병(正兵)이 있고, 오랑캐를 제어하는 데에는 경법(經法)과 권도(權道)가 있습니다. 여러 의논이 이미 같았는데,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고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유담년(柳聃年)은 “밭 가는 것은 농노(農奴)에게 묻는 것이 당연하고, 베 짜는 일은 계집종에게 묻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이 젊어서부터 북방에 출입하여서 오랑캐의 실정을 잘 알고 있으니, 신의 말을 청종(聽從)하기를 청합니다. 쓸모없는 선비의 말이 예로부터 이러한 바, 비록 이치에는 근사하나 다 따를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은 오히려 여러 논의를 물리치고, 변경으로 보내려던 것도 파하였다.

조광조는 3품관인데, 능히 한마디 말로써 임금의 뜻을 움직여 조정의 큰 논의를 바르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겼다.

또 대사헌 조광조가 임금의 총애를 받아 매양 소대(召對) 하였는데, 반드시 의리와 경전(經傳)에 종횡으로 드나들면서 말이 그치지 않았다. 비록 깊은 겨울이나 한여름이라도 한낮이 되도록 중지하지 않았다.

입대할 때에 한 말은 윤허 받지 않은 일이 없었으나, 함께 입시한 자는 매우 괴로워하고 모두 싫어하는 빛이 있었다. 결국 남곤 등이 몰래 조광조가 민심을 얻었다는 유언비어를 만들어 홍경주(洪景舟)의 딸 홍빈(洪嬪)을 통해 중종의 귀에 들어가게 하니, 임금의 마음에 의심이 없을 수 없었다.

조광조 등이 선비들의 행태가 부정한 것은 이익만 알고 의리를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니 남조된 공훈은 도태시켜 이익의 근원을 막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하고, 정국공신(靖國功臣)에 남록(濫錄)된 것을 도태시키시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중종은 조광조를 더욱 싫어하게 되고, 조광조는 마침내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는 “국가에서 대신을 대우하는 것이 이와 같이 초초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장차 간사한 사람이 미워하는 사람을 제 마음대로 죽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는 소장을 올려 말하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실행하지 못 하였다.

그리고 죽음에 임하여 시를 읊으니,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愛君如愛夫)/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네(憂國如憂家)/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시니(白日臨下土)/ 내 일 편 단심 충심을 밝게 비추리(昭昭照丹衷).”

‘나는 이제 죽어도 나의 충절을 역사가 알아주리라’는 충심이 서린 시이다. 당시 선비들은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서야 도(道)를 행하려 했던 것이다. 도(道)를 행하는 요체는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은 없으니 애석하다.

《중용》에서 ‘어리석으면서 자기를 내세우기를 좋아하며, 비천하면서 마음대로 하기를 좋아하며, 지금 세상에 나서 예전의 도(道)를 행하려 하면 재앙이 그 몸에 미치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하였으니 스스로 재앙을 자처 한 것인가.

조광조의 4년간 행적을 우리는 늘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 무엇도 아랑곳 하지 않는 자들도 또한 먼저 공리(公利)를 앞세운다. 그리고 나의 것은 나의 것이고, 너의 것도 나의 것이라고 하는 자들에게는 그의 푸른 뜻은 한갓 뜬구름이라고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