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 선양소주 사장 김광식
(1) 전 선양소주 사장 김광식
  • 주장환
  • 승인 2014.03.05 13:02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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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녘 일을 마치고 죽음 앞에 서니 마음이 가벼워”

 

주류업계의 증인…췌장암으로 마지막 “불꽃”
제비부부 통해 일부일처제를 가슴에 새겨

▲ 김광식 전 선양소주 사장. 자서전 제목 ‘인연의 고리’처럼 사람들은 연기(緣起)로 세상을 마중 나가고 또 떠나가는지도 모르겠다.
결코 미래의 일을 걱정하지 말라.

미래는 시간이 지나가면 현재가 된다.

현재가 될 때 너는 지금 자기 앞에 닥친 일을 처리하는

바로 그 이성의 도움을 받아 미래의 일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서로 얽혀 있으나, 그 유대는 신성하다.

이 세상에서 다른 사물과 관계가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사물은 모두 동등하며, 모두 밀접하게 결합되어 전 우주를 형성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중에서-

그렇다. 전 선양소주 사장 김광식씨(이하 김 사장)의 자서전 <인연의 고리>를 읽으면서 생각난 것이 바로 위의 글이다. 그는 췌장암으로 생명의 불꽃이 이 지상에서는 다해 감을 잘 알고 있으며, 이제 삶의 멍에를 내려놓고 품위있는 임종을 꿈꾸고 있다.

그가 제시한 임종은 1.천국을 소망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가는 것 2. 가족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가는 것 3.소중한 사람과 함께 하다 가는 것 4.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해 놓고 가는 것이다.

그에게 존엄사에 대해 물었다. 그는 존엄사를 '대찬성' 한다고 단언했다. 그리곤 "존엄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노인 병원에 가보라. 아마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고 조언했다. 그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웃으며 가는 것'이라고 부언했다.

이 말이 가슴을 찢어놓는다. 웃으며 가다니…. 웃음의 뿌리는 마음이라 했거늘 절대적 깨우침이 없으면 안 되는 일 아닌가? 존재론적인 인식으로부터 벗어나 연기론적인 인식, 즉 깨달음에 이르러야 가능한 마음가짐이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니 한때를 풍미했던 시인 천상병도 ‘이 세상을 소풍 온 것’이라 했다. 두 사람의 마음이 그런 경지인 듯해 고개가 떨구어졌다.

김 사장은 지인들을 모시고 담소를 나누며 자서전을 사인해 주었다. 이는 또 다른 연기(緣起)를 꿈꾸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마도 그럴 것이라는 지레짐작 하에 물었다. "어떤 의미인가?"

그런데 예상외로 간단했다. "내가 죽고 나서 내 영전에 온들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살아서 하는 임종의 뜻이 컸고, 내가 친구나 고마운 분들에게 해드릴 것이 마땅히 없었기에 이렇게라도 나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감정표현이라…. 그러고 보니 김 사장의 첫사랑 여인이 생각났다. 인터뷰 글이 너무 고답적으로 흘러가면 독자들이 지루해 할 것이므로 짓궂게 물었다. “첫사랑 연상녀는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했나?” “봤다. 애 둘을 데리고 있는 모습을 버스 속에서 봤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말이라도 붙여보고 차라도 한잔하지, 왜 그랬나 싶었다.

김 사장은 지금의 부인과 결혼하기 전 두 번의 연애사건이 있었다. 한 사람은 교회를 다니다 만난 2살 연상녀였는데, 어머니의 극렬한 반대로 헤어졌다. 또 한 사람은 김 사장이 ‘애정망상장애증(愛情妄想障碍症)’에 걸렸다고 표현한 ㅅ양으로, 나중에 부인이 된 정아씨가 ‘24세 나이에 걸맞지 않는 현숙한 편지’로 설득하여 포기하게 만든다.

편지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자서전에서 접한 그의 글은 문장이 군더더기가 없고 질박하며 감동이 있었다. 혹시 ‘현숙한 편지’를 쓴 부인의 영향을 받거나 문학활동이라도 한 게 아닌가 하여 물어봤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젊은 시절에 논리학이 재미있었고, 연애편지를 주고받을 때 조금이라도 잘 써보려고 시집 등을 뒤적이며 노력했던 것이 주효했으며, 국세청에 들어와서 세법을 다루다 보니 나름 논리가 세워졌다. 직장에서는 결재과정에서 상사가 내가 작성한 서류와 문장을 토씨하나라도 고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 만큼 완벽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기획실에 있을 때는 사장님의 연설문을 내가 도맡아서 작성했던 것도 큰 경험이었고, 후에 대전에 내려와서 지방신문 두 곳에 1년 동안 칼럼을 연재할 때 부쩍 실력이 향상되었던 것 같다. 이때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이때부터 기자, 작가. 논설위원님들 등 글 쓰시는 분들을 존경하기 시작했다. 그 외에 CEO로서의 관록도 실력향상에 보탬이 되었다. 나는 쓸데없는 형용사 남발, 중언부언, 같은 단어 중복쓰기 등을 주의했고, 너무 긴 장문도 싫어했다. 문장이 되도록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하게 보이려고 여러 번 수정을 거듭했다.”

그의 답을 듣고 보니, 기자이자 작가 말단에라도 있는 내가 괜히 가슴이 뜨끔해졌다.

그러고 보니 자서전을 읽다 기억력이 참 좋다는 느낌을 받은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천재인가 물었다.

그러나 그건 아니란다. 신기하게도 어린시절의 기억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며, 그 당시의 보았던 자연환경과 농촌풍경과 그리고 사건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했다. 그는 그 이유로, “요즘같이 TV 컴퓨터 게임 등이 없어 생각이 단순하였기에 그런지 모르겠다”고 나름의 해석을 내놨다.

▲ 가족. 이들은 말없이도 사랑하게 해주는 행복의 원천이다. 그것은 금방 헹구어낸 하늘이며 햇살이다.

김 사장은 어린 시절 처마 안쪽에 3채의 제비집이 있는 집에서 살았다. 매년 같은 제비부부가 날아오는 것을 보게 됐는데, 어린 눈에 신기하게 보였다고 했다. 일부일처제가 무언지도 모를 때였지만, 다른 동물과 달리 매년 같은 부부제비의 일관된 행동을 보고 놀랐다. 제비는 부부가 철저한 협동체제였다. 알을 품을 때도 교대로 하였고 육아 때도 서로 열심히 먹이를 물어 날랐다. 크면서 한낱 미물인 제비가 저럴진대, 하물며 사람은 일부일처제를 당연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에게서는 부인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아쉬웠던 일이 아내에게 더 신경 쓰지 못하고 아이들과 못 놀아준 점, 그리고 친어머님과 사랑을 나누지 못하고 가슴 아프게 한 점이라고 말한다.

김 사장은 두 분의 어머니를 모셨는데, 친어머니 이름이 ‘옴마따’라고 했다. 어린시절 그는 큰 어머니에게 입양되어 살았다. 집안에서 손자가 하나 밖에 없어서 만들어진 고육지책이었다. 그때 친어머니는 대성통곡을 했고 아이 역시 ‘옴마따’ ‘옴마따’라고 울부짖으며 발버둥을 쳤다. 옛 기억이지만 김 사장은 그게 “엄마를 따라 가겠다‘는 말로 추측된다고 한다. 아마 너무 절박해서 말을 다 매듭짓지 못해서 나온 말이 아닌가 한다.

큰어머니는 김 사장에게 관심이 지나쳐 반발심이 일기도 했으나, 사랑을 그런 식으로 밖에 표현 못하는 우리네 옛 여인들의 방식이었을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그리고 가장 가슴 아픈 일은 나이 50세가 넘어서야 친어머니에게 어머니라 불렀던 일이다. 그것도 친어머니가 지인에게 “광식이한테서 어머니 소리 한 번 들어 보는 게 소원”이라고 하더라는 말을 들은 후였으니, 웬만큼 둔감하기도 했다.

김 사장은 주류업계에 오래 근무했다. 세무서에서도 주류업계를 담당했으며, 진로를 거쳐 선양 사장을 역임했다. 그래서 애정이 깊을 수밖에 없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소주는 세계적인 술이라고 영국의 어느 학자가 발표한 것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주의 국제적인 지평을 넓혔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비싸게 돈 주고 사마시는 보드카도, 소주에 비하면 분명 한 단계 아래 술이다. 특히 진로를 비롯한 국내 업계는 관광객이나 교민만 상대하지 말고 한류붐을 타고 원주민을 상대로 마케팅을 펼쳐야한다. 특히 저도주 붐이 일고 있는 중국에 매진하면 어떨지? 가깝고 시장이 워낙 광대하니까. 맥주는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다양한 품질 개발이 급선무다. 그래서 우선 수입부터 억제하고, 역시 중국사장을 노려야 한다.”

더 묻다가 언제 말이 끝날지 몰라 세무공무원의 부패에 대한 처방책을 물었다. 그러나 그는 처방전 대신 상장을 내밀었다.

“세무공무원의 부패? 예전과는 다르다. 많이 정화되었는데 아직 사회적으로 덜 홍보된 것 같다. 일부 언론에 나오는 것은 극히 극소수다. 안타깝다. 완벽을 위한 처방책은 국민의식 함양과 공무원의 자긍심 살리는 교육이 절실한 것 같다.”

▲ (좌) 책표지. 김광식 사장은 자신의 삶을 ‘열정으로 빚어냈다’고 표현했다. (우) 외손녀 이하윤이 그린 ‘우리 할아버지’라는 제목의 그림은 눈물을 글썽이게 한다. 그는 아이의 그림을 통해 다시 생의 의욕을 느낄 것이다.

그는 매우 논리적이다. 그러고 보니 사회학과 논리학이 재미있었다고 자서전에 기록해 놓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면이 재미있었는가” 물었더니 “사회학은 사회전반의 실상을 조명하는 게 재미있었다. 공부해 보면 신기함의 연속이다. 인문학의 진수인 문승규 박사님의 재미있는 강의도 한몫했다. 논리학은 기승전결이 명확하여 나의 체질에 맞았다. 철학박사 최일운 박사님의 영향도 컸다“는 즉답이 돌아왔다.

김 사장은 야구와 마라톤을 즐긴다고 했다. 골프도 몇 십 년했는데 야구선수로 가장 손꼽을 만한 사람은 미국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류현진을, 마라토너로는 이봉주를 꼽았다. 그 이유는 너무 순진하고 성실해서란다. 두 사람의 성격도 비슷하다고 토를 달았다. 골프에 대해서는 묻지 못했다. 준비 부족이 가져온 재앙이다.

각설하고, 루소처럼 여자들 앞에서 엉덩이를 까든, 니체처럼 말의 목을 잡고 울든, 바흠(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의 주인공) 처럼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 뛰다 피를 토하고 죽든, 인생은 부질없다. 부질없는 인생에 마음 맞는 친구가 제일이다. 공자도 ‘자원붕래 불역열호’(自遠朋來 不亦說互/먼곳에 사는 벗이 찾아오니 기쁘지 아니한가)라 했다.

그는 나이가 들면 운동을 하면서 끼리끼리 친구를 사귀는 것이 좋다고 충고한다. 혼자 떨어져 외톨이가 되면 치매가 온다고 처방을 내린다. 그리고 여유가 생기면 나보다 못가진자, 나보다 덜 배운 자, 나보다 병약한 자를 위해 봉사를 일상화하는 것이 부질없는 인생에서 행복을 찾는 길이라고 조언했다.

기실 인생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게 되며,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若有此卽有彼 若生此卽生彼 若無此卽無彼 若滅此卽滅彼)는 부처의 말씀에 귀를 열면 훨씬 편안해 지리라. 김광식 사장의 자서전 제목 ‘인연의 고리’처럼 사람들은 연기로 세상을 마중 나가고 또 떠나간다.

그는 마지막으로, “베풀어 주신 분들에게 별로 보답을 못했다. 세월이 지나고 죽을 때가 되니 후회막급이다. 은혜를 입었으면 보답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거늘, 미루지 말고 그때 그때 보답해 드려야 한다”고 자책했다.

살면서 일어나는 근원적 질문에 대한 사유와 성찰은 답답한 가슴에 더덕더덕 붙은 비활성 콜레스테롤 같은 망상을 제거해 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성긴 퍼포먼스로 삶의 진리를 찾아가기엔 너무 아득한 길이 천 길 낭떠러지처럼 아찔해 보인다. 이제 그 길을 접고 먼 길을 떠나려 하는 노신사는 사진 속에서 소년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