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총리 녹음은 날조다
터키 총리 녹음은 날조다
  • 온라인 편집부
  • 승인 2014.02.27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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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총리가 아들과 거액의 현금을 은폐하는 계획을 논의한 내용이라는 녹음파일이 폭로돼 정국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집권당의 비리와 언론탄압 등을 고발하는 감청자료는 '비리 스캔들'이 터진 이후 꾸준히 유출됐지만 이번 파일의 여파는 종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는 25일(현지시간) 녹음된 내용은 날조된 것이라고 부인하고 파일 유출을 '반역적 공격'이라며 강경하게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반면에 야당들은 파일에 녹음된 대화 내용은 사실로 드러났다며 총리 사퇴와 검찰의 수사를 촉구했다.

◇ 연일 '감청 폭로전'…"총리, 아들과 거액 현금 은폐 논의"

검찰과 경찰이 지난해 12월17일 장관 3명의 아들과 국책은행장 등 주요 인사를 뇌물 등의 혐의로 대거 체포한 것을 계기로 감청자료 폭로전이 본격화했다.

검찰은 공식적으로 수사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감청 파일과 녹취록 등을 포함한 수사자료가 인터넷과 반정부 성향의 언론, 야당 등을 통해 잇따라 폭로됐다.

사건 초기에는 체포된 용의자와 관련한 감청 파일 위주로 유출됐으나 이달부터는 에르도안 총리의 전화통화를 녹음한 파일이 공개되기 시작했다.

에르도안 총리를 감청한 파일도 초기에는 언론 검열과 관련한 내용으로 '비리 스캔들'과 큰 관련이 없었으나 점차 충격의 강도가 세졌다.

에르도안 총리의 아들 빌랄 에르도안이 이사를 맡은 재단이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 등이 제기되더니 24일 밤에는 총리가 검경의 작전 당일에 아들과 10억달러(약 1조730억원)의 현금을 은폐하고자 논의하는 통화 내용이 공개됐다.

검경은 장관 3명의 아들과 국책은행장, 유명 사업가 등을 체포할 당시 자택을 압수수색해 금고와 신발상자 등에 있던 거액의 현금을 압수한 바 있다.

에르도안 총리는 미국에 망명 중인 이슬람 사상가 페툴라 귤렌이 이 작전의 배후로 지목했으며 정계에서는 한 때 동맹 관계였던 두 사람이 권력 다툼을 벌이는 양상이라고 분석했다.

검찰과 경찰에는 귤렌을 지지하는 세력이 대거 요직을 차지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에르도안 총리는 '12월17일 작전'을 "국가 내부의 갱단이 정부를 전복하려는 사법 쿠데타"라고 비난하고 있다.

에르도안 총리는 25일 유튜브에 올라온 녹음파일이 날조된 것이라고 반박하고 "터키 총리를 겨냥한 용납할 수 없는 반역적 공격"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 파일이 트위터를 통해 빠르게 공유된 것과 관련해 "'로봇 로비'가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에르도안 총리는 지난해 여름 반정부 시위 당시 외부 세력이 터키 경제에 타격을 줘서 국채 금리가 오르면 이득을 취하려는 '금리(interest rate) 로비'를 벌인다는 음모론을 제기했으며 최근 비리사건 수사도 같은 세력의 소행이라고 비난해왔다.

다만 에르도안 총리는 지난 5일 한 방송사에 방송 중이던 야당 대표의 발언 보도를 중단하라고 요청한 통화 녹음 파일이 공개됐을 때는 전화한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2012년 1월 총리 집무실에서 도청장치가 발견된 이후 자신과 가족들도 감청당하고 있다는 주장을 거듭했다.

친정부 성향의 일간지 2개사도 전날 검찰과 경찰이 에르도안 총리를 비롯해 장관과 야당 의원, 언론인, 학자 등 수천명을 3년 이상 감청했다고 보도했다.

뷸렌트 아른츠 부총리는 이 보도와 관련해 2천280명이 감청 대상에 포함된 것을 확인했다며 '평행 정부'의 불법 도청이라고 비난했다. '평행 정부'는 '국가 내 국가'라는 뜻으로 집권당인 정의개발당(AKP)이 귤렌 지지세력을 비난하는 용어다.

◇ 야당 "총리 퇴진" 총공세…전국적 반정부 시위 조짐

야당은 비리사건 수사가 본격화하면서 줄기차게 총리 사퇴를 촉구했으며 이번 감청파일 공개를 계기로 공세의 강도를 높였다.

제1야당인 공화인민당(CHP) 케말 크르츠다로울루 대표는 이날 의원총회에서 녹음파일을 3~4곳에서 확인한 결과 조작이 아닌 것으로 판명났다며 "총리는 사퇴하든지 헬기를 타고 도망가라"고 주장했다.

그는 에르도안 총리를 '프라임 미니스터'(총리)라고 부르는 대신 "프라임 거짓말쟁이, 프라임 도둑"이라고 맹비난했다.

크르츠다로울루 대표는 에르도안 총리가 자신에게 "우리는 당신의 숨쉬는 것까지 알고 있다"고 말했다며 "정부는 수많은 대상을 감청하다가 지금 자신의 비리와 관련한 것들이 폭로되니까 감청을 비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제2야당인 민족주의행동당(MHP) 데블레트 바흐첼리 대표도 총리의 퇴진을 촉구하고 검찰에 총리를 수사하라고 촉구했다.

바흐첼리 대표는 "에르도안 총리가 아들 빌랄에게 형과 삼촌 등과 논의해서 훔친 돈을 서둘러 집에서 치워버리라고 요구했다"며 "총리는 22억리라의 더러운 돈을 다른 집에 숨기라고 급하게 지시했다"고 말했다.

야당 대표들은 총리의 날조 주장에 맞서 전문기관에 의뢰해 진위를 가리자고 요구했다.

에르도안 총리가 이번 감청자료 폭로의 배후로 지목한 귤렌 측도 반박에 나섰다.

귤렌의 변호사인 누룰라 알바이라크는 현지 일간지 자만과 통화에서 "귤렌은 감청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며 오히려 귤렌의 통화가 불법으로 도청돼 고소한 상태라고 말했다.

이날 오후 이스탄불과 수도 앙카라, 안탈리아, 삼순 등 주요 도시에서는 집권당의 부패를 비판하고 총리 퇴진을 촉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트위터 이용자들은 '모든 것이 거짓말, 어디서나 부패'라는 해시태그(#)를 사용해 시위 참여를 촉구하고 있다. 이 구호는 지난해 이스탄불 탁심광장에서 촉발된 반정부 시위 당시 '모든 곳이 탁심, 어디서나 저항'을 차용한 것이다.

또 트위터 이용자들은 총리가 로봇과 악수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을 올려 총리의 '로봇 로비' 주장을 조롱하는 글도 속속 올라왔다.

익명을 요구한 정계 관계자는 "이번에 공개된 파일은 종전에 제기된 비리 의혹이나 감청 자료보다 충격적으로 여파가 상당히 클 것"이라며 "그러나 집권당의 지지 기반이 탄탄하고 지금까지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아왔다는 점에서 정국이 급변하는 사태까지 예견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