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
조선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
  • 황미숙
  • 승인 2014.02.1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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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를 제치고 결혼한 정희왕후>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 1418, 태종18)∼1483, 성종14) 본관은 파평(坡平), 판중추부사 증영의정 윤번의 딸이다.

홍주 군아(郡衙)에서 태어나 1428년(세종 10)가례를 행하였으며, 처음에는 낙랑부대부인(樂浪府大夫人)에 수봉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의 김종서(金宗瑞) 등의 제거를 위한 거사 때 용병(用兵)이 누설되어 손석손(孫碩孫) 등의 만류가 있었으나, 대군이 중문에 이르자 정희왕후가 갑옷을 들어 입혀서 용병을 결행하게 하였다.

1455년(세조1)왕비에 책봉되었고, 1457년 존호를 자성(慈聖)이라 하였으며, 1469년(예종 1) 흠인경덕선열명순휘의(欽仁景德宣烈明順徽懿)의 존호를 더하였다. 또 1471년(성종2) 원숙신혜신헌(元淑愼惠神憲)을 가상하였다. 1483년 온양에 있다가 행궁에서 죽으니 66세였다. 덕종·예종과 의숙공주(懿淑公主) 등 2남 1녀를 두었다. 능은 양주에 있는 광릉(光陵)이다.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의하면, 영묘(英廟, 세종) 때에 광묘(光廟, 세조)가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잠저(潛邸)에 있을 때의 일이다.

길례(吉禮 혼례)를 아직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처음에는 정희왕후의 언니와 혼사에 대한 논의가 있어서 감찰 각씨가 그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주인 되는 부인이 그 처녀를 데리고 나와서 그와 함께 앉아서 대화를 나누었다.

이때 정희왕후가 아직 어린 나이로 짧은 옷과 아이의 머리를 하고 주인의 뒤에 숨어서 앉아 있었는데, 각씨가 이를 보고 말하기를, “이 아이가 기상이 범상하지 않으니 한번 보고 싶습니다.” 하고는, 그를 본 뒤 감탄하여 칭찬하기를 마지않았다. 그러고는 입궐(入闕)하여 이를 아뢰었는데, 마침내 그 아이와 정례(定禮)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감찰 각씨가 사람을 볼 줄 안다고 하였다.

정희왕후는 장남 덕종이 요절하고 차남 예종이 19세로 즉위하자 조선 최초로 대왕대비 칭호를 받았고, 수렴청정을 하였다.

예종이 재위 14개월 만에 승하하자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齊安大君)이 원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희왕후는 ‘원자는 너무 어리고, 월산군(의경세자의 장남)은 병치레가 많으니 차남인 자을산군으로 대통을 잇게 하자’하여 성종을 즉위 시킨 후 7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지난 계유정란 때 거사가 누설되어 망설이던 세조에게 갑옷을 내어주면 독려했던 일이나 아들과 손자 두 차례의 섭정에서 보듯이 성종이 66세로 승하할 때까지 정희왕후의 세력은 세조 생존 때만큼이나 기세등등하여 여제(女帝)라고도 하였다.

정인지의 아들을 사위로 삼고 당대의 실세 한확의 딸을 장남 며느리로 받아들이니 그가 의경세자비 소현왕후 한씨(인수대비)였으나 의경세자는 스무 살에 요절하였다.

둘째 며느리 장순왕후(예종 비, 한명회 셋째 딸)는 원손을 낳다가 산후병으로 죽고, 원손도 어미를 따라 갔다.

그녀의 손자 성종의 원비(공혜왕후, 한명회 넷째 딸)는 18살로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성종의 다음 왕비 폐비 윤씨로 말미암아 조선 임금 중 최초로 왕위에서 쫒겨 나는 연산군이 증손이다.

연산군은 자신을 나무라는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며, 큰어머니 월산대군 부인 박씨를 겁탈하여 자결케함으로서 그 동생 박원종이 중종반정의 선봉이 되었다. 이렇듯 조카인 단종을 죽음으로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세조와 후손들의 참혹함은 세조자신이 겪어야 했던 피부병 보다 더 가혹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세조의 꿈마다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가 나타나 저주를 퍼부으며 침을 뱉었다고 하는데 깨어나서 보면 그 자리가 짓무르고 가려웠다고 한다.

하루는 오대산 상원사을 찾아 문수보살상 앞에서 100일 기도를 했다. 기도 후, 상원사 계곡물에 목욕을 하는데 마침 지나가는 동자승이 있어 등을 밀어 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네가 행여나 사람을 만나더라도 상감의 옥체에 손을 대고 흉한 종기를 씻었다는 얘기는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더니 동자승이 미소를 지으며 “상감께서도 후일 누구를 보시던지 오대산에서 문수동자를 친견했다는 말씀을 하지 마십시요”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권력 때문에 혈육 간에 빚어진 비극이 당대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이어졌던 것인가. 잘 되면 내 덕이고 잘못 되면 조상 때문이런가. 그러나 세조는 자신이 했던 일이 가슴 아팠던 것 일게다. 꿈속에서 조차 편안하지 못했던 삶은 결국 지독한 피부병을 앓아야 했던 것이다.

누구나 벗어나고 싶은 아픈 비밀 하나씩 정도는 가슴에 품고 살아가리라. 그러나 과거의 상처가 현재의 삶을 부여잡게 하고 있는 것은 더 가슴 아픈 일이다. 묻어둔 비밀 때문에 지금의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 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