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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
조선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
  • 황미숙
  • 승인 2014.02.0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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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이 장릉 쪽을 향해 고개 숙여 자란다.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 1440년~1521년)는 조선 단종(端宗)의 정비이다.

시호는 의덕단량제경정순왕후(懿德端良齊敬定順王后)이다.

여량부원군 송현수(礪良府院君 宋玹壽)의 딸로,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남편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면서 군부인(君夫人)으로 격하되었다가, 관비가 되었다.

한때 신숙주가 그를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고 하나 낭설이라고 한다.

이후 세조는 송씨가 노비이지만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냈다. 이후 남편 노산군의 명복을 빌다가 82세에 사망하였으며, 그녀의 묘소 뒤편에 심은 나무들이 단종의 능인 장릉 쪽을 향해 고개 숙여 자란다는 전설이 한 때 전해졌다.

무속의 신의 한 명으로 숭배됐는데, 무속에서는 그녀를 송씨 부인 신이라 부른다. 그녀의 별세 때에는 대군부인의 격에 따라 치러진 장례로 경기도 양주군(楊州) 군장리(群場里,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에 매장됐다.

그런데 이곳이 해주 정씨의 선산이라서 무덤 역시 해주 정씨 가족들의 무덤이 있다.

정순왕후의 남편인 단종에게는 유일한 가족이 누나인 경혜공주가 있었는데, 경혜공주가 해주 정씨인 정종(鄭悰, 정종은 단종의 거의 유일한 벗이었고, 세조 즉위 후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과 혼인을 한 것이 인연이 되었고, 정순왕후가 사망한 이후에 정종의 아들이자 정순왕후의 시양자인 정미수, 그리고 정미수의 양자인 정승휴(정종에게는 손자가 된다.)가 정순왕후를 자신들 가문의 선산인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그리고 해주 정씨가문에서 정순왕후 송씨의 묘까지 관리해 주었다고 한다.

《장릉지(莊陵志)》〈해평가전(海平家傳)〉에 이르기를, “노산군부인(魯山君夫人) 송씨가 살아 있을 때 성 안에 있으려 하지 않고 동쪽 교외에 살면서 노릉(노산군의 능, 장릉)을 바라보기를 원하므로 조정에서 동문 밖에 집을 짓고 영빈정동(英嬪貞洞)이라 불렀는데, 부인이 따로 초가 몇 칸을 짓고 살면서 소의소식(素衣素食; 흰옷을 입고 채소 음식을 먹음)으로 일생을 지냈다.

단종과 정순왕후의 복위로 종묘에 배향되면서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했는데 이는 억울하게 살해된 남편을 사모(思慕)한다는 뜻에서 지은 것이다.

중종 때부터 복위가 거론되다가 송시열, 김수항의 거듭된 건의로 1698년(숙종 24년)에 단종과 함께 복위되어 왕후로 추봉되었다.

《청성잡기(靑城雜記)》에 의하면 영월(寧越) 매죽루는 단종이 유배되었을 때에 거처하던 곳이다.

두견새를 읊은 단종의 시 두 수가 있으므로 자규루(子規樓)라고 개칭하였으며, 명월루(明月樓)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누각은 만력(萬曆) 을사년(1605, 선조 38)에 큰물에 무너졌는데 금상(今上) 경술년(1790, 정조 14)에 관찰사 윤사국(尹師國)이 부사(府使) 이동욱(李東郁)과 상의하여 중건하려 하였으나 옛터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새로 자리를 물색하려 하였는데 천둥번개와 뇌우(雷雨)가 쏟아져 일을 방해하였다.

그다음 날 큰 바람이 불어 민가 다섯 채를 불태웠는데 그 재를 날려 보내자 문양이 새겨진 주춧돌이 드러났으니, 그곳이 바로 매죽루의 옛터였다.

마침 겨울이라 얼음과 눈으로 사방이 막혀 나무나 돌을 운반할 수 없어 염려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흘 동안 큰비가 내려 강의 얼음이 전부 녹아서 재목을 운반해 오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다음 해 봄에 완공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숙종이 사릉에 참배를 갔는데 비가 오자, 세상 사람들은 문종비(文宗妃)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이 복위되던 날 내렸던 세원우에 비하였다.

영조 병진년(1736, 영조 12) 8월에도 참배를 갔는데 또 비가 내렸다.

금상 신유년(1801, 순조 1) 9월에 장릉에 참배 갔는데 날씨가 청명하자, 상께서 신하들을 돌아보시며 “오늘 틀림없이 비가 올 것이다”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비가 왔다.

아, 장릉과 사릉은 이제 잘 받들어 여한이 없을 텐데도 여전히 신기한 자취를 보임이 이와 같으니, 아마 아직 맺힌 한이 남아 있는가 보다. 자그마하게 조성된 사릉은 괜스레 애처롭게 여겨진다.

장릉에는 사릉에서 가져다 기른 ‘정령송(精靈松)’있는데 이 소나무 한 그루로 부부의 정을 풀 수 있으려나 싶다. 서울과 영월로 서로 떨어져 살아야 했던 부부의 아픔이 죽어서도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인지상정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사후의 일들은 죽은 자가 아닌 살아있는 자의 바람이 강력하게 발휘될 뿐이다.

늘 먼저 간 자의 뜻 보다는 남은 자들의 의도가 결과를 다르게 만들고 있다. 그래도 누군가가 훗날 기억하며 슬퍼해 준다면 그것이 이 땅에서 살다간 유일한 흔적이라도 가장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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