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씨 집안의 아이는 참으로 큰 인물이 될 것이다.
노씨 집안의 아이는 참으로 큰 인물이 될 것이다.
  • 황미숙
  • 승인 2013.12.05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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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보진재 노사신

노사신(1427(세종 9)∼1498 (연산군 4))의 자는 자반, 호는 보진재·천은당이며 본관은 교하, 좌의정을 지낸 한(?)의 손자이며 동지돈녕부사를 역임한 물재의 아들이다.

노사신은 세종이 서둘러 등용하려고 한 해에 5급씩이나 옮겨 좌문학(左文學)을 거쳐 승정원 동부승지에 발탁 임명하고 우부승지에서 도승지에 승진시키니, 국가의 기무를 모두 위임하였다. 그는 재상에 임명되어서는 역시 자문하기 위해 늘 내전으로 불러들였고 경(經)과 사(史)를 강론함에 있어 공의 분변해 대답함이 소리의 울림과 같았다. 임금이 늘 밤중에도 권태를 모르고 책을 봄으로 금중(禁中)에서 유숙하는 날이 많았고, 때론 휴가로 나갔다가도 곧 부름을 받고 들어와 하루도 집안에서 쉬는 일이 없었다. 또한 상정국(詳定局)을 개설하고 《경국대전》을 편찬하게 하되 대신에게 명하여 분장해서 재정하라 하니, 호전(戶典)은 곧 노사신의 편찬이었다. 임금이 일찍이 재상의 재목을 자세히 논함에 있어 그를 지목하여 ‘활달 제일(豁達第一)’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는 평소에 성격이 조용한 것을 좋아하여 모당(茅堂)에 즐겨 살았다. 그 재(齋)에 ‘보진(?眞)’, 당(堂)에 ‘천은(天隱)’이라 스스로 호를 붙였으며 한 방 좌우에는 도서뿐이었다.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을 내었는데, 다만 취흥만 취할 뿐이었고 기이한 것을 찾아 호사를 자랑하지 않았다. 퇴계가 어떤 사람에게 준 편지에서 예전에 노사신이 어느 사람과 더불어 종에 대한 송사를 했었다. 어떤 사람이 재상과 더불어 송사하는 것이 어떻게 될지 헤아리지 못하여서 노비 문서를 노공(盧公) 앞에 바치면서, “정승댁의 노비인 것이 옳음으로 노비 문서를 바치는 것입니다. 다만 소인의 집에는 이 노비 외에는 다시 다른 노비가 없으니, 이제부터는 상인(常人)이 되겠습니다.” 하였다. 노공이 불쌍히 생각하여 말하기를, “너의 궁함이 이에 이르렀더냐? 내가 다시는 너와 더불어 이것을 가지고 다투지 않겠다.” 하며, 이어 그의 노비 문서를 돌려주고 단연코 다시 송사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노사신은 사가로 치면 세종과는 이종4촌간이었으나, 인척관계 보다 공정을 첫째로 삼는 조정 법도때문에 개인적으로 영달하는데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아니 하였는데, 세조와 성종이 노사신을 크게 쓴 것은, 오직 그의 학문이 깊고 문장이 탁월했으며,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한편, 노사신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권력을 부리려는데는 목숨을 내 걸고 반대하고 나섰던 올곧은 인품의 정치인이었다.

《해동잡록》4 본조(本朝) 유자광편을 살펴보면, 김종직은 대역이란 죄목을 받고 그 문하의 김일손(金馹孫) 등은 주살되기도 하고 귀양가기도 하여 당시 훌륭한 인물들이 모두 휩쓸렸다. 유자광은 의기 만만하여 내외에 위엄을 부리니 조정에서 독사같이 보았으나 감히 그 뜻을 거스르지 못하였다. 자광이 죄인 신문에 참가하여 잔인하게 고문하면서, “이 놈들은 한 놈도 남겨서는 안 된다.” 하니, 추관(推官 : 심문을 맡은 정승) 노사신(盧思愼)이 손을 흔들어 말리며, “당초 우리들이 이일을 상감께 아뢴 것은 사초(史草)에 관한 것 뿐이었는데, 이제와서는 마치 사사로운 원한을 푸는 것 같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의 본 뜻이 아니오! 어쩌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되었오!”라 하자 임금 연산군도, 훈구대신들을 매몰차게 비판하여 원한을 샀던 신진선비들을 막무가내 죽일 수 없었으니, 이로써 목숨을 건진 인재들이 많았다.

이렇듯 노사신은 중간에 후회하고 많은 사류(士類)를 구제하여 옥사가 커지지 않도록 노력했고, 옥사가 진행되는 중에 병으로 세상을 떴다.

노사신은 15세기 후반 수많은 관찬서(官撰書)의 편찬에 참여하여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1476년(성종 7)에는 서거정 등과 함께 《삼국사절요》를 편찬하고, 1478년 역시 서거정과 함께 《동문선》을 편찬하였다. 1481년에도 서거정과 함께 《동국통감》의 수찬에 참여하였으며, 또 그 해에 서거정 ·강희맹(姜希孟) ·성임(成任)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을 총재하였다. 묘소는 본래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에 있던 것을 1940년에 현 위치로 옮긴 것이며,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백석리에 자리한 노사신 묘역에 있는 노사신의 신도비가 있다.

부모 자식의 인연도 하늘이 정한 것이겠으나, 군신간의 인연도 하늘이 정한 것이리라. 그러나 사제지간의 인연 또한 같은 이치이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을 모시는 일은 제자의 몫이 더 많은 것은 아닌가 싶다.

공자도 가르치기를 게을러서는 안된다고 하였듯이 제자도 스승에게 배우기를 게을러서는 안될 것이다. 좋은 스승님 모시고 좋은 제자님들이 있는 자가 어찌 달리 복을 구하려 하겠는가. 자식이 훌륭해야 부모는 빛나는 것이고, 스승은 제자가 훌륭해야 빛나는 법이라 했던가. 스승님께 나는 어떤 제자이런가 살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