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찬 선비 남명
칼을 찬 선비 남명
  • 장재진
  • 승인 2013.11.28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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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 선생은 조선 처사의 상징이다. 처사는 평생 벼슬을 하지않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정진하는 선비를 말한다.

그가 말년에 기거했던 산청 덕천의 산천재 대문에서 일직선으로 바라보면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

남명 선생은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이곳 덕천에 학당을 개설하고 후학한 조선의 대표적 사림이다.그는 연산군 7년이던 1501년 합천 삼가면에서 태어났다 같은 해에 퇴계 이황선생은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후에 두 선생은 좌 퇴계 우 남명으로 영남학파의 거봉이 됐다.퇴계선생이 경상좌도 사림의 영수라면 남명 선생은 경상우도 사림의 영수였다.70세(퇴계), 72세(남명)까지 장수를 한 두 사람은 각자 많은 제자들을 양육했다.

두 사람의 제자들은 동인 정파를 형성한다. 영남학파를 바탕으로 한 동인 정파는 다시 퇴계학파의 남인과 남명학파의 북인으로 나누어 진다.

퇴계 선생은 34세 때 문과에 급제해 사대부의 길을 걷게 되지만, 남명은 초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해 나라의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는다.

남명 선생은 출세의 길을 거부하고 재야 지식인의 길을 선택했다.때문에 오늘날 퇴계보다는 비교적 덜 알려진 학자로 남아 있다.두 사람의 현실정치에 대한 견해는 달랐다.

퇴계 선생은 현실정치의 성리학이었다. 남명 선생은 미래가치를 중시하는 성리학 학풍이었다. 차이는 있어도 나라를 덕으로 바로 세우고자 함은 같았다.

남명의 ‘신명사도(神明舍圖)’는 그의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나타낸다.남명 선생을 일컬어 ‘칼을 찬 선비’라 부른다.그는 늘 몸에 방울과 칼을 품고 다녔다.

‘성성자(惺惺子)’라고 불린 방울은 걸을 때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기 위해서였고, ‘경의검(敬義劍)’이라는 칼은 사욕이 일어나면 단칼에 베어버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는 이론보다 실천을 우선시했다.

부조리한 현실과 절대 타협하지 않으려 했다.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분연히 일어서도록 가르친 학자였다.남명 선생의 후학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직접 칼로 일어서는 의병들의 주축이 됐다.

분열과 혼돈의 오늘, 남명 조식선생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를 되돌아 본다.  

장재진 / 본지 온라인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