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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만약 사초를 보면 후세에 직필이 없게 된다
임금이 만약 사초를 보면 후세에 직필이 없게 된다
  • 황미숙
  • 승인 2013.11.25 18: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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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

맹사성(孟思誠, 1360년, 공민왕9~1438년, 세종20)은 고려말~조선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충청남도 아산의 신창이다.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이다.

맹사성은 충청남도 아산 온양 출신으로 모친을 여읜 뒤 어린 나이에 3년간 시묘를 해 훗날 그의 이야기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수록됐다. 1386년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춘추관검열이 됐고,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자 관직을 사퇴했으나, 조정에 출사해 후배들을 지도하라는 동료들의 권고로 조선에 출사했다. 맹사성은 최영의 손녀 사위였는데 처조부인 최영을 본받아 인생의 사표로 삼았다. 또한 그의 재능을 특별히 눈여겨 본 이성계는 그가 자신의 정적 최영의 손녀 사위임에도 연좌시키지 않고 중용했다.

세종은 문치주의 정책을 펼치면서도 건강이 나빠서 세 명의 정승에게 조정의 대소사를 맡아보게 했다.

황희는 주로 인사, 행정, 군사 권한을 맡겼고 맹사성에게는 교육과 제도 정비, 윤회에게는 상왕 태종과의 중개자 역할과 외교 활동을 맡겼고, 과거 시험은 맹사성과 윤회에게 분담해 맡겼다. 나중에 김종서가 재상의 반열에 오를 때쯤에는 국방 업무는 김종서에게 맡겨서 보좌하게 했다.

세종은 부드러움이 필요한 부분은 맹사성에게 맡기고, 정확성이 요구되는 부분은 황희에게 맡겼다. 따라서 황희는 변방의 안정을 위해 육진을 개척하고 사군을 설치하는 데 관여, 지원하기도 했고,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이에 반해서 맹사성은 음률에 정통해서 악공을 가르치거나, 시험 감독관이 되어 과거 응시자들의 문학적, 학문적 소양을 점검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 맹사성과 비슷한 윤회에게는 주로 외교 업무와 상왕 태종과의 매개자 역할, 외교 문서의 작성과 시험 감독관 등의 업무가 부여됐다. 세종대왕은 이들 재상들의 능력을 알면서도 권력남용의 가능성을 우려해 한 사람에게 대권을 모두 넘겨주지는 않았다. 이들 재상들은 맡은 분야와 업무를 서로 분장하거나 서로 공유하기도 했다. 맡은 역할과 성격을 떠나 이들은 모두 공정하고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맹사성은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모의 상에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살았다. 묘 앞에 잣나무가 있었는데, 어느 날 산돼지가 나무를 부딪쳐 나무가 말라죽게 되자 맹사성이 나무를 안고 울었다. 그러자 그날 밤 산돼지가 호랑이에게 먹혀 죽어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맹사성은 1435년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으나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세종은 반드시 그에게 자문했다고 한다. 맹사성의 사람됨이 소탈하고 엄하지 않아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을 갖추고 대문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역시 공손하게 배웅해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공무가 아닌 일에는 결코 역마를 이용하지 않고, 소를 타고 다니거나 걸어다녔다고 한다.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해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 조정에서 봉급으로 주는 쌀)로 했고, 바깥출입을 할 때에는 소타기를 좋아해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1431년(세종13)에 <태종실록>이 완성되니, 세종이 읽어보고 싶었다. “춘추관(春秋館)에서 <태종실록> 편찬을 이제 다 마쳤으니, 내가 한번 보려고 하는데 어떤가?” 우의정 맹사성(孟思誠) 등이 아뢰었다. “전하께서 만일 보신다면 후세 임금이 반드시 이를 본받아서 실록을 고칠 것이며, 사관(史官)도 임금이 볼까봐 사실을 반드시 다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진실을 전하겠습니까.” 그 해 3월 20일의 <세종실록> 기사다.

세종은 이후에도 <태종실록>을 열람하고자 했으나 반대에 부딪혔다. 미련이 남았는지 세종은 이틀 후 춘추관에 명해 태종이 <태조실록>을 열람한 적이 있나 없나 상고해 아뢰도록 했다. 선례를 찾아본 것이다. 그러나 태종도 열람한 적이 없다는 답변을 들어야 했다.

원칙을 정해 놓았지만 그것을 지키고 실천하는 일은 그리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켜야 할 원칙을 어느 만큼이나 최선을 다해서 지키고 있는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정도가 있으면 권도가 있다. 그런데 무엇이 원칙이었는지 되물어야 하는 사회에서 젊은이는 누구의 뒷모습을 닮아가며 살아갈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내가 가는 길이 후학에게도 길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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