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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한 백이와 조화로운 유하혜는 결국 하나의 도입니다
청백한 백이와 조화로운 유하혜는 결국 하나의 도입니다
  • 황미숙
  • 승인 2013.11.18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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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남효온(南孝溫, 1454, 단종2∼1492, 성종 23)의 본관은 의령이고 자는 백공,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이다. 영의정 재(在)의 5대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준(俊)이고, 아버지는 생원 전(?)이며, 어머니는 도사 이곡(李谷)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수학하였고,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그는 영욕을 초탈하고 지향이 고상하여 세상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김종직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우리 추강’이라 했을 만큼 존경했다한다.
1478년(성종 9) 성종이 직언을 구하자, 25세에 소를 올렸다. 첫째 남녀의 혼인을 제때에 치르도록 할 것, 둘째 지방 수령을 신중히 선택, 임명하여 민폐의 제거에 힘쓸 것, 셋째 국가의 인재 등용을 신중히 하고 산림(山林)의 유일(遺逸 : 과거를 거치지 않고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는 학식이 높은 선비)도 등용할 것, 넷째 궁중의 모리기관(謀利機關)인 내수사(內需司)를 혁파할 것, 다섯째 불교와 무당을 배척하여 사회를 정화할 것, 여섯째 학교 교육을 진작시킬 것, 일곱째 왕이 몸소 효제(孝悌)에 돈독하고 절검(節儉)하여 풍속을 바로잡을 것, 여덟째 문종의 비 현덕왕후(顯德王后, 단종의 어머니)의 능인 소릉(昭陵)을 복위할 것 등이다. 소릉 복위는 세조 즉위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명분을 직접 부정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매우 위험한 제안이었다. 이 때문에 훈구파(勳舊派)의 심한 반발을 사서 미움을 받게 되었고, 세상 사람들도 그를 미친 선비로 여기었다.
1480년 어머니의 간청에 따라 마지못해 생원시에 응시, 합격했으나 그 뒤 다시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 김시습(金時習)이 세상의 도의를 위해 계획을 세우도록 권했으나, 소릉이 복위된 뒤에 과거를 보겠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 뒤 벼슬을 단념하고 당시의 금기된 일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때로는 무악(毋岳)에 올라가 통곡하기도 하고 남포(南浦)에서 낚시질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영희(辛永禧)·홍유손(洪裕孫) 등과 죽림거사(竹林居士)를 맺어 술과 시로써 마음의 울분을 달래었다. 산수를 좋아하여 국내의 명승지에 그의 발자취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편으로 “해와 달은 머리 위에 환하게 비치고, 귀신은 내 옆에서 내려다본다.”는 ‘경심재명(敬心齋銘)’을 지어 스스로 깨우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금기에 속한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 6인이 단종을 위하여 사절(死節)한 사실을 <육신전(六臣傳)>이라는 이름으로 저술하였다. 그의 문인들이 장차 큰 화를 당할까 두려워 말렸지만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의 명성을 소멸시킬 수 없다 하여 ≪육신전≫을 세상에 펴냈다. 그가 죽은 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고담궤설(高談詭說)로써 시국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그 아들을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 때에는 소릉복위를 상소한 것을 난신(亂臣)의 예로 규정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였다.
그의 아들 이름은 충서(忠恕)인데 정신병이 있었다. 연산군이 남효온의 시체를 부관참시하면서 아들도 함께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자 충서는 오히려 큰소리를 치면서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를 죽이러 왔던 관원이 이를 상부에 보고하였다. “본래 미친 병이 들었으니 인간으로 칠 것도 못 됩니다.” 그러나 연산군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미친 자가 세상에 있으면 무엇하겠느냐? 반드시 죽여버려라.” 결국 아들 충서마저 죽으니 그의 부인 조씨는 형장에서 시체를 수습해 3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날씨가 추워 시체가 꽁꽁 얼어 있었다. 조씨는 밤낮으로 시체를 끌어안고 몸으로 녹여 염습한 다음 관에 넣어 장사지냈다고 한다. 1513년 소릉이 복위되고 신원되어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1782년(정조 6)에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남효온은 술을 끊고 김시습이 보내온 편지에 답문을 보내었는데, “술이 깬 굴원(屈原)이나 술이 취한 백륜(伯倫)은 본래 둘이 아니고, 청백한 백이(伯夷)와 조화로운 유하혜(柳下惠)는 결국 하나의 도입니다. 선생께서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목생(穆生, 전한(前漢) 초원왕(楚元王) 때의 사람. 초원왕이 주연(酒宴)을 베풀면서 술을 좋아하지 않는 목생을 위하여 항상 단술을 마련했다고 한다)을 억지로 허물하지 마시고 한 글자로써 가부를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술에 의지하여 자신의 푸른 뜻을 달래었나 보다. 또한 김시습은 남효온이 술을 끊어다는 말에 서운함을 드러내었는데 “오로지 주정만 하는 것은 이미 말할 것도 없지만, 완전히 끊는 것도 예에 크게 어두워서 중용을 잃음이 매우 심하니 군자가 행할 도리가 아닙니다. 만일 혹 끊어야 하는 것이라면, 《논어》에서 공자는 ‘술에 일정한 양이 없었으나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고 하거나 ‘술 때문에 곤란을 겪지 않는 일이 어찌 내게 있겠는가.’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어머니의 성화를 핑계로 술을 끊은 남효온이나 아쉬워하는 김시습 사이에서 오고 간 편지 내용에서 보면 예로서 벗을 사귀었던 아름다운 정이 보인다. 내게도 이러한 벗이 있는가 싶다. 그러나 내 나름대로 나를 기억해 주는 이가 있을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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