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 황미숙
  • 승인 2013.11.11 15: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73.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청한자(淸寒子), 벽산(碧山)이며, 법호는 설잠(雪岑), 시호는 청간(淸簡)으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김시습은 1435년 (세종 17)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야사에서는 김시습이 태어나기 전날 밤, 근처에 있던 성균관 유생들이 그의 집에서 공자(孔子)가 태어나는 꿈을 꾸었는데, 정말로 다음 날 김시습이 태어나자 장차 귀한 인물이 될 징조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이웃에 살던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이 논어에서 인용한 “배우면 곧 익힌다”는 뜻으로 시습(時習)으로 짓기를 권유하여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는 태어난지 8달 만에 글자를 알았고, 세살 때에는 이미 시(詩)를 지었다. 즉, 맷돌에 보리를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누런 구름이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는 시를 읊었다고 한다. 그의 천재성은 곧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좌의정 허조(許稠)가 김시습의 소문을 듣고 호기심으로 그의 집을 찾았다. 김시습을 만난 허조(許稠)는 그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네가 아주 글을 잘 짓는다 하던데, 이 늙은이를 위하여 늙을 노(老)자를 넣어서 시 한 구절을 지어 줄 수 있는가?”라고 하였고, 이 말을 들은 김시습은 조금도 주저하는 바 없이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만은 늙지 않았도다(老木開花心不老)”라고 하였다.
 

이러한 소문은 드디어 대궐 안에까지 알려졌고, 대궐로 불려 온 김시습의 능력을 여러 방면으로 시험해 보았으나, 어린 나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이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보고 받은 세종은 김시습의 재주를 가상히 여겨 비단 50필을 상으로 주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면서 김시습이 그 많은 비단을 어떻게 가져가는지 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이 도움을 받지 말고 혼자 가져가야 한다고 분부하였다. 이에 어린 김시습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각 필의 끝을 서로 묶은 다음 그 한쪽 끝을 허리에 묶어서 끌고 나갔다고 한다. 이 광경을 목격한 세종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감탄하였고, 세종은 김시습이 성장하면 등용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가 21세가 되던 해에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것을 중흥사에서 듣게 되었다. 그는 통분을 금치 못하고 꼬박 사흘 동안 망연자실하여 방 안에만 틀어 박혀있던 김시습은 공부하던 책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는 머리카락마저 잘라버리고 산을 내려와 세상을 방황하기 시작하였다. 아무런 계획 없이 방랑길에 나섰던 김시습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효령대군은 조카인 세조에게 그를 적극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김시습은 세조의 불경(佛經) 번역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조정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계유정난(癸酉靖亂) 때의 공신들이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보고 세상사가 다시 역겨워진 김시습은 경주에 있는 금오산(金烏山)으로 들어가 칩거하고 만다.
 

하루는 한강을 지나다가 강변 압구정(鴨鷗亭)에 걸려있는 한명회(韓明澮)의 시를 발견하였다. “젊어서는 사직을 짊어지고, 늙어서는 강호에 눕는다(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라는 시이었다. 이를 본 김시습은 두 글자를 고쳐 놓았다.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靑春亡[扶]社稷, 白首汚[臥]江湖)”. 김시습은 지친 몸을 이끌고 마지막 길을 부처에게 의탁하고 싶었던지 병든 몸으로 부여 무량사(無量寺)를 찾아간 그는 1493년(성종 24)에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무량사에는 그의 초상화를 모신 각과 부도(浮屠)가 있다.
 

김시습은 생전에 2편의 자화상을 남겼다. 그는 자화상을 그린 후 거기에 찬(贊)을 붙였는데, “모습은 지극히 하찮고 네 말은 지극히 어리석으니, 의당 너를 산골짜기에 두어야 하리(爾形至 爾言至大 宜爾置之丘壑之中).”라 하였다.


내 길은 간다고 하면서도 늘 뒤돌아보고 곁눈질하며 슬그머니 돋아나는 마음은 무엔가. 《논어》에서 공자는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해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라 하지 않겠는가(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라 하였다. 아마도 천 번은 되뇌였으리라. 그래도 여전히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마음은 역시 군자이기가 어려운건가 보다. 앞으로 천 번은 더 되뇌여야 할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