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속보
저술에 뜻을 독실히 하여 늙을 때까지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저술에 뜻을 독실히 하여 늙을 때까지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 황미숙
  • 승인 2013.10.21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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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집현전 학사,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권근(權近)의 외손자.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공조참의 등을 지냈다. 1460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에 올랐으며, 1464년 조선 최초로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6조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성종 때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고 달성군(達城君)에 책봉되었다. 〈경국대전〉·〈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동문선〉 편찬에 참여했으며, 왕명으로 〈향약집성방〉을 언해했다. 그의 저술서로는 시문이 다수 실린 〈사가집〉 등이 있다. 명나라 사신 기순(祁順)과의 시 대결에서 우수한 재능을 보였으며 그를 통한 〈황화집(皇華集)〉의 편찬으로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그의 글씨는 충주의 화산군권근신도비(花山君權近神道碑)에 남아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대구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 되었다.
서거정은 45년간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文風)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 폐위와 사육신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의 혹독한 비평가였던 김시습과도 미묘한 친분관계를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은 집을 뛰쳐나와서 방랑 생활을 하였다. 만약 성안에 오게 되면 어린아이들이 떼를 지어 뒤따라 오면서, ‘다섯살’하고 불러대었다. 대개 동봉이 다섯 살 적에 신동이란 별명이 있어서 나라의 부름을 받고 대궐에 나아갔기 때문인 것이다.
성안에 들어와서는 번번이 향교동에서 묵고 있었는데,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찾아가면 동봉은 예우하지 않고 벌렁 드러누워서 두 발을 거꾸로 벽 사이에 기대고 발장난을 하면서 종일 동안 얘기하였다. 동리 이웃 하인들이 모두 이르기를,“김 아무가 서 상국을 예우하지 않고 이처럼 모욕을 주었으니, 다음에는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다.”하였다. 그 뒤 며칠 만에 서 정승은 다시 와서 찾아보았다고 한다.

서거정의〈졸기〉에서 보면 그가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는데, 낭중(郞中) 기순(祈順)과 행인(行人) 장근(張瑾)이 사신으로 왔다. 기순은 사림(詞林)의 대수(大手)로서 압록강에서 서울까지 도로와 산천의 경치를 문득 시로 표현해 읊으니, 서거정이 즉석에서 그 운에 따라 화답하되 붓을 휘두르기를 물 흐르는 듯이 하며, 어려운 운을 만나서도 10여 편을 화답하는데 갈수록 더 기묘해지니, 두 사신이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기순이 태평관부(太平館賦)를 짓자 서거정이 차운(次韻)하여 화답하니, 기순이 감탄하기를, “부(賦)는 예전에 차운하는 이가 아직 있지 아니하였으니, 이것도 사람이 하기 어려운 것이다. 공과 같은 재주는 중조(中朝)에 찾아도 두세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하였다.
이렇듯 서거정은 한때 사문(斯文)의 종장(宗匠)이 되었고, 문장을 함에 있어 시(詩)를 더욱 잘하여 저술에 뜻을 독실히 하여 늙을 때까지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혹시 이를 비난하는 자가 있으면, 서거정이 말하기를, “나의 고황(膏?)인지라 고칠 수 없다.”하였다. 조정에서는 가장 선진(先進)인데, 명망이 자기보다 뒤에 있는 자가 종종 정승의 자리에 뛰어 오르면, 서거정이 치우친 마음이 없지 아니하였다. 서거정에게 명하여 후생(後生)들과 더불어 같이 시문(詩文)을 지어 올리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서거정이 불평해 말하기를, “내가 비록 자격이 없을지라도 사문(斯文)의 맹주(盟主)로 있은 지 30여 년인데, 입에 젖내나는 소생(小生)과 더불어 재주를 겨루기를 마음으로 달게 여기겠는가? 조정이 여기에 체통을 잃었다.”하였다. 서거정은 그릇이 좁아서 사람을 용납하는 양(量)이 없고, 또 일찍이 후생을 장려해 기른 것이 없으니, 세상에서 이로써 작게 여겼다고 평가 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24년에 “덕행을 세우는 것이 최상이요, 공업을 이루는 것이 그다음이요, 훌륭한 말을 남기는 것이 그다음인데, 이 세 가지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없어지지 않으니, 이를 일러 썩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大上有立德 其次有立功 其次有立言 雖久不廢 此之謂不朽〕”라는 노(魯)나라 숙손표(叔孫豹)의 말이 나온다. 즉 옛날의 군자는 화순(和順)함이 안에 쌓여서 그것이 문장(文章)으로 나타나고 영가(詠歌)로 드러난다고 한다. 서거정에게도 옹니박이가 있었던 듯하다. 그러니 노둔한 자들은 오죽 할까 싶다. 그러나 기록은 드러냄과 숨김이 있다. 그래서 독실히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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