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에 대 없는 글귀는 없다
천하에 대 없는 글귀는 없다
  • 황미숙
  • 승인 2013.10.14 15:46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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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집현전 학사, 학역재(學易齋) 정인지(鄭麟趾)

정인지(鄭麟趾, 1396~1478)의 자는 백저(伯雎)이고 호는 학역재(學易齋)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포은 정몽주의 학통을 사사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집현전 대제학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집현전관(集賢殿官)에 선발된 뒤 집현전에서 근무하며 훈민정음 연구에 참여하였고, 이조판서가 되어 삼남 지방에 토지 등급을 정했다.

《세종실록》의 편찬과 감수를 맡았으며, 세조를 지지하여 계유정난, 세조반정 등에 적극 동조하였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주도한 계유정난에 협력한 공로로 특별승진하여 좌의정에 발탁되고,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에 책록 되면서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군되었다.

영의정부사에 승진하고 세조 반정을 지지한 공로로 좌익공신(左翼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영의정부사를 지냈으며, 역사와 고전에도 능하여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용비어천가》의 편찬과 감수, 《태조실록》의 수정에도 참여하였다.

예종 때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남이·강순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 공신(翊戴功臣) 3등관이 되고, 예종 사후 원상으로 서정을 주관하다 의경세자의 차남 자을산군을 지지한 공로로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 되었다.

그의 장남 정현조는 세조의 사위였고, 손자 정승충은 세조의 서자 덕원군의 사위가 되어 이중으로 사돈관계를 형성하였다. 고손녀 하동부대부인은 선조의 생모가 된다. 또한 중종의 후궁 희빈 홍씨의 외증조부가 되기도 하다.


정인지의 아버지 흥인(興仁)이 처음에 정 삼봉에게 수업하였는데, 여러 번 과거를 보았지만 합격하지 못하였으며, 그 집은 소격서(昭格署) 곁에 있었다. 재초(齋醮 단(壇)을 모으고 기도하는 것)할 때마다 반드시 목욕하고 잠잠히 기도하기를, “나는 이미 성공하지 못하였으니, 바라건대, 집을 일으킬 아들을 낳게 하여 주십시오.” 하니, 하동이 태어났는데 보통 아이보다 뛰어나게 달랐기 때문에 남들이 여러 별자리에서 정기(精氣)를 나누어 받고 왔을 것이라고 하였다.


정인지(鄭麟趾)는 급제와 중시(重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벼슬은 수상에 이르렀고, 여섯 임금을 내리 섬겼고, 수는 80세까지 살았다.

정인지 등은 《용비어천가》 1백 25장(章)을 지었는데, 먼저 예전의 제왕(帝王)의 업적을 서술(敍述)하고 다음에 조종(祖宗)의 사업과 목조(穆祖)가 기반을 일으킨 때로부터 태종이 임금이 되기 전까지를 서술하여서 조정의 잔치와 제사 드리는 데에 악사(樂辭: 음악에 따르는 노래 가사)로 삼았다.


정인지는 천자(天資)가 호매(豪邁)하고 활달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술이 취하여, 옛사람을 논의하다가 말하기를, “나 같은 자가 만일 성인[孔子]의 문하에 놀았다면, 안자(顔子)ㆍ증자(曾子)까지는 미처 따를 수 없지마는, 자하(子夏)ㆍ자유(子游)의 무리와 비교하는 것은 어떨는지 모른다.” 하였다. 퇴청 때나 휴일에도 쉬지 않고 학동들과 문하생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으로 소일하였다.


집에서 쉬는 날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낙을 삼아 게으름을 잊고 또 글을 가르치다가 주로 어른을 공경하는 글귀와 순수한 말에 이르면 반복하여 가르치고, 제자들을 모아 놓고 몸소 계율을 가르쳤는데, 그는 늘 “요(堯)임금의 덕(德)은 ‘윤공극양(允恭克讓)’이라 하고, 순(舜)임금의 덕(德)은 ‘온공윤색(溫恭允塞)’이라 하며, ‘휘유의공(諱柔懿恭)’은 문왕(文王)의 덕목(德目)이며, ‘온량공검(溫良恭儉)’은 공자(孔子)의 덕목이라”하고 “옛날 성인들이 살아오신 것을 보면 이렇게 덕을 숭상하고, 또 공경하였으니, 그 아래 사람들이 어찌 감히 어른들을 무시할 수 있었겠는가. 하시고 지금 사람들을 보면 편히만 살려고 하여 남을 무시하는 기운이 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느냐” 하며 수기와 겸손을 강조하였다.


세조가 일찍이 정인지의 집에 가서 곧장 침실로 들어가 정인지의 손을 잡고 이르기를, “공과 혼인을 맺어야 되겠소.” 하였다. 정인지가 세조가 비상한 뜻이 있는 것을 알고 허락하였다.

큰 일을 거행하던 날, 정인지가 대궐에 들어가기 전에 가사를 처리하고 집안사람들에게 유언을 남기기를, “오늘 오후에 내가 사람을 보내어 성패를 통지할 테니 만일 소식이 없거든, 너희들은 내가 죽은 줄 알아라.” 하였는데, 오후에 큰 일이 성취되니, 과연 사람을 보내어 통지하면서, 입었던 속옷 한 가지를 보냈는데, 옷이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세조 말기부터 정계에 진출한 사림파는 정몽주 학파였으나, 정인지가 세종의 유지를 버리고 수양대군을 지지한 일로 선배로 인정하지 않고 비판을 받았다.

또한 남이의 옥사가 억울한 죽음이라는 시각이 중종 때 이후로 보편화되면서 그는 비판, 성토의 대상이 된다.

또한 그의 《용비어천가》는 한글로 된 초기 작품임에도 폄하되어 주목,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였다. 나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얼마나 제대로 읽고 쓰는지 모를 일이다. 내사 사용하는 말과 글이 비판의 칼날을 세우는데 급급한 것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