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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이 총명해 갈수록 총애를 받았다
천성이 총명해 갈수록 총애를 받았다
  • 황미숙
  • 승인 2013.09.09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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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중국 원나라 혜종의 황후, 기황후(奇皇后)

1259년, 고려의 태자(훗날 원종)가 북경에 머물고 있던 왕자 쿠빌라이를 찾아와 항복의 의사를 밝혔다. 형제들과 권력투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쿠빌라이는 오랜 적국이었던 고려의 자진 항복에 유리한 입장을 얻는다. 고려의 항복은 형제들과의 권력투쟁에 있어서 자신의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명분 하나를 획득한 것이었다. 이어서 쿠빌라이는 고려의 국체를 보전해줌과 아울러, 몽고의 풍습과 제도를 강요하지 않겠음을 약속하였다. 결국 고려는 지루한 전쟁을 종식시키고, 국가보존이라는 소기의 성과를 얻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고려는 몽골과의 긴 전쟁 중에 민중들의 생활은 말 할 수 없이 피폐해졌고, 《고려사》에 나오듯이 한번에 20만 명이 넘는 고려인들이 노예로 끌려가기도 했다. 그리고 고려가 국체를 보존했다고 해서 단지 평화만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쿠빌라이의 일본원정 준비로 온 나라의 국력이 완전 소모 되었을 뿐 아니라, 동방의 해상무역국가로 명성을 날리던 고려의 대상선단은 몽고의 강압으로 완전 파괴되어 국가의 주요한 수입원이던 대외무역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고려에 대해 몽고는 매년 일정한 공물을 바칠 것을 요구해왔다. 그 목록 중에는 환관과 공녀가 포함되어 있었다. 의심이 많은 몽골인들은 국가의 주요한 부서에 한족(漢族)을 기용하는 것을 꺼렸다. 1274년(원종 15년) 공녀가 140명을 시작으로 연평균 40~50명 정도가 몽골관리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다. 그들은 재수가 좋으면 궁녀가 되거나, 귀족의 첩실로 들어앉을 수 있었으나, 대개는 노리개가 되거나 잡부로 한 많은 인생을 마쳐야했다. 특히 공녀를 선출하는 권한은 몽골관리에게 전적으로 주어져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아무집이나 들이닥쳐서 끌고 갔는데, 그중에는 왕족이나 정승의 귀족집안 여자까지 있었다. 목은 이색이 “공녀로 선발되면 우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있고,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있다”고 말할 정도로 비참한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고려귀족의 딸로서 공녀로 끌려간 여성이 있었다. 훗날 기황후(奇皇后)라 불린 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의 황후가 된 여자였다. 그녀는 고려 관료였던 기자오(奇子敖)의 딸이며 기철(奇轍)의 누이인데 1333년(충숙왕 복위 2년) 고려사람 내시 고용보(高龍普)의 힘으로 원나라 왕실의 궁녀가 되어 순제(順帝)의 총애를 받았으며 딸을 하나 낳았다. 1335년 순제의 황후가 죽자 순제가 기씨를 황후로 책봉하려 했으나 권신(權臣) 바이옌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1339년 황태자 아이유시리다라를 낳았고 다음해 1340년 제2황후에 책봉되었다. 순제는 어려서 원나라 권력투쟁의 여파로 고려에 귀양 조치되어 살았었다. 그러나 곧 순제를 지지하는 세력이 득세하면서 고려에 살던 그는 대도로 금의환향하여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황실의 환경에 적응치 못하고 있었던 이 황제는 어린 시절 고려의 추억에 빠져 황궁의 궁녀였던 기씨(奇氏)를 후궁으로 맞아 들였다.

당시의 황궁은 고려출신 궁녀와 환관이 태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고려출신 환관들(고용보, 박불화 등)과 기황후는 황실의 권력투쟁을 거치면서 반대파를 숙청하고, 제1황후를 독살한 끝에 마침내 정실황후가 되었다. 황후가 되자 실권을 장악하여 쇠운이 깃든 원나라를 극도의 부패와 혼란에 빠지게 하였으며, 고려 조정에도 큰 영향을 끼쳐 기철 일파로 하여금 탐학과 횡포를 자행하게 하였으므로 이 후 공민왕의 자주운동 때에는 기철 일파의 세력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하게 된다. 한편 원나라에서는 궁중에 고려의 미인들을 많이 두어 대신들의 배필로 삼게 함으로써 원나라의 고관·귀인들 사이에서는 고려 여자와 결혼을 해야만 명가(名家)가 된다는 관습까지 생기게 되었었다. 고려풍속과 언어의 유행은 온 대도를 휩쓸었고 이를 고려양(高麗樣)이라고 하였다.
이후 원나라의 수도 대도(大都)에서는 권력투쟁에 여념이 없었다. 기황후의 아들 아이유시리다라를 황태자로 임명한데 이어 순제로부터 양위까지 받으려하자, 볼루르 테무르는 위대한 몽골제국에 고려혈통이 황제로 들어설 수 없다고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수년간 양측의 갈등의 결과로 25만 명의 주원장 군대가 대도에 무혈입성을 하였다. 그 후의 그녀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의 시신은 조선으로 운구되어 경기도 연천현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시신이 언제 조선에 운구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금강산 장안사에는 그녀의 위패가 봉안되어 넋을 기리기도 했다. 경기도 연천군에 안장된 뒤 그녀를 제향하는 큰 재실이 있어 그 주변은 ‘재궁동(齋宮洞)’ 또는 ‘쟁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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