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오래도록 조금도 허물이 없었다
살면서 오래도록 조금도 허물이 없었다
  • 황미숙
  • 승인 2013.09.02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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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고려 선종 비(妃), 사숙왕후(思肅王后) 이씨

고려 제 13대 국왕 선종(宣宗 1049~1094)은 문종의 둘째 아들로 인예왕후 소생이다. 그는 글을 잘 썼고 시도 지었다. 1083년 부왕(문종) 사후 왕위를 계승한 순종이 재위 3개월 만에 병사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선종 시대는 불교와 유교의 균형적인 발전을 토대로 매우 안정되었으며, 외교에서도 거란을 포함한 송· 일본· 여진 등과 광범위한 교역을 추진하며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1085년 왕의 아우 의천(義天)이 몰래 송나라에 들어가 2년 동안 불법을 공부하고 돌아오자 송나라에서 항의하였으나 선종은 사절을 보내 이를 무마시켰다. 송나라에서 돌아오는 의천을 태운 배가 예성강 포구에 도착하자 선종은 친히 마중 나가 환영의식을 성대하게 하였는데, 의천을 불경과 경서 1,000권을 바쳤고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으며 송· 일본· 요 등지에서 서적을 사들여 거의 4,000여 권 책을 모두 간행하게 하였다.
선종의 정비(正妃)이자 헌종(獻宗)의 어머니인 사숙왕후(思肅王后, ?~1107년, 추정)는 인주(仁州,인천) 이씨 이석(李碩)의 딸로, 이자연(李子淵)의 친손녀이다. 그녀는 정신현비의 육촌 언니이며, 시어머니인 인예왕후, 인경현비, 인절현비에게는 친정 조카가 된다. 사숙왕후와 정신현비는 자매간이었고, 원신궁주는 사숙왕후, 정신현비 자매와 사촌간이었다. 선종은 먼저 평장사 이예의 딸인 정신현비를 비로 맞이하였으나 경화왕후를 낳고 사망하였다. 이후 사숙태후는 선종이 국원공(國原公)으로 있을 때 혼인하여 연화궁비(延和宮妃)에 책봉되었으며 헌종과 수안택주를 낳았다. 1083년, 선종이 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왕후로 책봉되었다. 1094년, 선종이 승하하고 아들인 헌종이 즉위하자 왕태후가 되었으며 왕실의 어른으로서 11세의 어린 헌종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였다. 1094년, 헌종은 승하한 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지만 나이가 어리고 소갈증으로 매우 병약하여 어머니인 사숙태후가 수렴청정하였다. 1년 뒤인 1095년에 이자의(李資義)가 한산후(漢山侯) 균(원신궁주(元信宮主) 이씨 소생)을 옹립하려고 했으나, 숙부인 계림공 왕희(뒤에 고려 숙종)가 이를 미리 알고 장사 고의화를 시켜 살해했다. 이 기간 동안 사숙태후는 왕태후가 되어 자신이 살던 궁전을 중화전(中和殿)으로 부르게 하였으며 휘하에 부(府)를 두어 자신의 독자적 정치 기구인 영녕부(永寧府)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고 이자의(李資義)가 반란을 일으키는 등 국가적 혼란이 일어나게 되자 사숙태후는 1년 만에 섭정을 거두었으나 헌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숙부인 계림공(鷄林公)에 의해 축출되고 1095년, 숙부인 계림공이 고려의 제15대 왕인 숙종으로 즉위하였는데 즉위 이후 숙종은 왕권의 강화를 목적으로 사숙태후의 궁전인 중화전(中和殿)의 호(號)와 사숙태후가 설치한 영녕부(永寧府)를 폐지하였고 1097년에는 헌종마저 승하하였으나 이후에도 옛 궁에 살면서 오래도록 조금도 허물이 없었다고 한다.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에 얽힌 설화가 있다. 선종에게 적당한 후사가 없어 고민에 빠져있었다. 어느 날 그의 3번째 부인인 원신궁주(元信宮主. 인주이씨 평장사 이정의 딸)의 꿈에 도승 2명이 나타나‘우리는 파주 장지산에 있습니다. 식량이 떨어져 배가 고프니 이곳에 있는 두 바위에 불상을 새겨주세요’이상하게 생각한 궁주는 사람을 보내 확인해 보니, 큰 바위가 발견되어 불상을 만들었다. 얼마 뒤, 그 도승이 다시 꿈속에 나타나 ‘왼쪽 바위에 미륵불을, 오른쪽 바위에 미륵보살상을 만들어 공양하고 기도를 드리면 아이를 원하는 사람은 아들을 얻고, 병이 있는 사람은 완쾌될 것입니다’ 도승의 부탁대로 두 불상을 새기고 그 아래 용암사의 전신인 절(이름은 전하지 않음)을 세우고 기도 하니 소망하던 아들 한산후 왕윤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설화와는 달리 선종은 아들 태자 왕욱(헌종, 2째 부인 사숙왕후의 아들)이 심히 병약하여 소갈증까지 앓고 있는 상황에서 건강한 아들을 더 얻으려고 했던 모양이다.
《고려사절요》에 예종 2년(1107년) “사숙왕후 이씨를 선종묘에 배향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승하한 것으로 보이며, 인종 18년에 정화(貞和)라는 시호를 추가하고 고종 40년에 광숙(匡肅)을 추가하였다. 능은 개성에 있는 인릉으로, 《고려사》에서‘춘추의 의(義)에 국군(國君)이 즉위하여 해를 넘기지 않은 자는 장차 소목에 서열하지 못한다하였으니 국군도 오히려 이렇거늘 하물며 후비(后妃)리요. 청컨대 사숙으로 올려 부제 하였다’고 했으니 사숙왕후는 남편인 선종과 합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사숙태후의 딸 수안택주(遂安宅主, 1088년 ~ 1128년)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나이가 40세가 되도록 혼인을 하지 못하다가, 1128년(인종 6년) 그 생을 마감하였다.
근친혼의 풍속을 가진 고려 왕실문화에서 춘추의 잣대를 세워 기록하는 《고려사》에서 사숙왕후의 정치력은 빛을 발하고 있는 듯하다. 첫째부인이었던 정신현비를 선종묘에 합장하지 아니하고 헌종의 모후인 사숙왕후가 죽어서 선종과 함께 합장된다. 역시 자식이 출세해야 부모가 빛나는 법인가보다. 은사님 이야기처럼 제자가 훌륭해야 스승이 빛나고, 자식이 훌륭해야 부모가 대접을 받는다 했던가. 지금 부터라도 가르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