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의 아내는 죽더라도 마음을 고쳐먹지 않을 것입니다
소신의 아내는 죽더라도 마음을 고쳐먹지 않을 것입니다
  • 황미숙
  • 승인 2013.08.19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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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백제, 도미부인(都彌夫人)

《삼국사기》<열전>에서 전하는 ‘도미설화’속의 도미(都彌)는 백제(百濟) 사람이다. 비록 소민(小民)이라도 의리는 알았다.
그 아내가 아름답고도 절행(節行)이 있어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개루왕(蓋婁王)이 이야기를 듣고 도미를 불러 말하되 “대개 부인의 덕이 정결(貞潔)하다 하나 만약 으슥한 곳에서 잘 꾀기만 하면 마음이 변할 이 많다. 도미가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헤일 수 없사오나 신의 아내는 죽더라도 마음을 고쳐먹지 않을 것입니다.” 왕이 시험하고자 하여 도미를 멈추어 두고, 한 근신(近臣)으로 하여 왕의 의복을 입히고 말을 태워 그 집에 이르러 그 집 사람에게 먼저 왕이 왔다 하고, 그 아내에게 이르되 “내 오랫동안 네 예쁘다는 말을 듣고 도미와 더불어 내기를 하고 왔노라. 내일은 너를 들여 궁인(宮人)을 삼아 이후로는 나의 소유가 되리라.” 하고 드디어 어지러이 하려 한대, 그 아내가 가로되 “왕의 말씀을 내 어찌 어기리까. 대왕께서는 먼저 방으로 드소서. 나는 옷을 갈아입고 오리라.” 그리고 한 비자(婢子)를 단장하여 들이었다.
왕이 그 뒤 속은 줄을 알고 크게 노하여 도미의 두 눈을 빼어 내 보내어 배에 태워 강에 띄웠다. 그리고는 그 아내를 붙들고 놀려 하매 가로되 “내 이제 남편을 잃고 다만 한 몸으로서 누구를 의지하리까. 더구나 대왕에게 어찌 어기리까. 마침 몸이 더러웠으니 다음에 목욕을 하고 오리이다.” 왕이 믿고 말았다.
그 아내는 문득 밤에 도망하여 강에 이르러 통곡하였다. 별안간 배 하나가 이르러 타고 천성도(泉城島)에 가서 그 남편을 만나 고구려(高句麗)로 가 살았다. 도미부인은 비록 앞을 보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 있었지만, 남편은 죽지 않고 살아 있어 그때부터 부인은 남편 도미의 눈이 되어 보살피면서 풀뿌리로 겨우 연명하며 지내다 배를 타고 고구려의 산산(蒜山) 아래로 가니, 고구려 사람들이 이들 부부를 불쌍히 여겨 옷과 먹을 것을 대주어 근근이 살다 일생을 마쳤다.
도미부인 설화의 배경이라고 여겨지는 개로왕의 시대는 백제가 한성시대를 마감하던 시기이다. 백제 한성시대 마지막 임금은 개로왕이다. 개로왕은 아신왕때 부터 60년간 고구려에 억눌려 있던 것에 분개하며 고구려를 공격할 준비를 세웠다. 그리고 북쪽변경에 위치한 쌍현성 수리, 청목력에 큰 목책을 세우는 등 고구려와의 결전에 대비를 하는 치밀함 까지 계산을 하였다. 북위에 사신도 보내 협공할 것을 제안했으나 북위의 거절로 실패하였다 개로왕이 북위에 사신을 보낸 것은 바로 고구려에 알려져 큰 파장을 불러왔다.
고구려는 백제를 치기에 앞서 도림을 첩자로 보냈다. 도림은 백제왕에게 고구려에서 죄를 짓고 쫓겨 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바둑을 좋아한다는 개로왕의 취미를 알아내어 개로왕의 신임을 얻었다. 그리하여 도림은 백제의 위세를 높이려는 명문을 내세워 화려한 궁궐을 꾸미고 선왕의 무덤을 화려하게 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한강변에 둑을 쌓아 홍수에 대비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백성들이 공사를 한다고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어서 도리어 해가 되고 말았다. 도림은 먼저 몰래 달아나 버리고 고구려는 출격준비를 하였다.
개로왕은 후회하며 아들 문주에게 피신하도록 지시, 자신은 붙잡혀 문주를 제외한 왕족이 몰살당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이것은 훗날 문주왕이 암살이 되는 왕권약화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
도미부인의 설화는 왕이 백성의 아내를 욕심내다가 실패했다는 내용이다. 왕이 자신의 권력을 믿고 미색의 부인네를 희롱하였으나 결국 그녀의 절개를 빼앗을 수 없었다는 문학작품과 같은 설화를 《삼국사기》<열전>에 기록한 김부식 세운 삼국의 민간 여인의 효성, 의리, 정절이 오늘날에도 그 잣대가 유효한 것인가. 그녀의 동상이 서울특별시 강동구 천호2동, 광진교를 건너며 남쪽 끝부분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옛 백제시대의 한성 나루터였을 법한 한강 변 공원에 있다. 도미부인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여기저기서 동상을 세우고 정절상을 제정하고 자신들의 지역에서 도미부인이 배를 타고 떠난 포구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름다운 아내를 믿음으로 지켜낸 도미와 도미부인은 행복했을까. 왕의 욕심만을 탓하려고 했던 것인가. 아니면 예나 지금이나 권력 앞에서 조강지처를 버리는 세태를 꼬집으려 했던 것인가. 어쩌면 삼국시대부터 혼인에 대한 절의를 지키며 예를 아는 문화민족임을 드러내려 했던 김부식 나름의 자긍심은 아닐런지 하고 우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