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주를 함부로 드러내지 말라
재주를 함부로 드러내지 말라
  • 황미숙
  • 승인 2013.07.2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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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조선개국공신 양렬공(襄烈公), 이지란(李之蘭)

이지란(李之蘭)[1331(충혜왕 1)∼1402(태종 2)]의 본관은 청해(靑海), 초성은 퉁, 초명은 쿠룬투란티무르(古論豆蘭帖木兒). 자는 식형(式馨), 남송 악비(岳飛)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여진의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부카(阿羅不花)이며, 이화영(李和英)의 아버지이다.

그는 이성계와는 결의형제를 맺었고, 출신지는 북청(北靑: 靑海)이다. 첫째 부인은 함안군부인(咸安郡夫人) 혜안택주(惠安宅主) 윤씨(尹氏)이며, 둘째 부인은 태조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조카딸인 상산군부인(象山郡夫人) 곡산 강씨(谷山 康氏)이다.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천호가 되었으며, 1371년(공민왕20) 부하를 이끌고 고려에 귀화해 북청에서 거주하며, 이씨 성과 청해를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그는 조선에 와서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 공훈으로 1392년(태조1)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오르고, 보조좌명개국일등공신(補祚佐命開國一等功臣)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다.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나자 그도 청해에 은거하면서 남정·북벌에서 많은 살상을 한 것을 크게 뉘우쳐 불교에 귀의했다 한다.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함경남도 청군 신북청읍 안곡리에 있다. 시호는 양렬(襄烈)이다.

이지란과 태조 이성계와의 일화를 《연려실기술》에서 전한다. 태조가 일찍이 칭찬하기를, “두란(豆蘭)의 말달리고 사냥하는 재주는 사람들이 혹시 따라갈 수가 있지만, 싸움에 임하며 적군을 무찌르는 데는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라고 했다.

또한 태조가 공과 함께 길에서 노는데, 촌 여자가 물동이를 이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태조가 먼저 철환(鐵丸)을 던져 구멍을 뚫어 놓자 물이 새어 나오기 전에 공이 당장 조그맣게 뭉친 진흙으로 그 구멍을 막으니, 보던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고 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이지란이 태조를 해칠 생각이 있었는데, 어느 날 어두운 때에 태조가 뒷간에 앉은 것을 보고 공이 활을 당겨 쏘니, 태조가 그 화살을 손으로 받았다.

그가 또 계속해 두 번을 쏘았으나, 태조가 다 받았다. 공은 태조가 그 화살에 맞았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태조가 그 화살을 공에게 돌려주니, 공이 놀라 마음으로 굴복되어 그때부터 감히 딴 생각을 먹지 못했다.” 라고 했다.

1380년 8월 왜구는 손시제(孫時制)를 우두머리로 해 500여 척의 배를 타고 금강 어귀에 있는 진포(鎭浦 : 지금의 서천)에 상륙했다. 고려정부에서는 나세·심덕부(沈德符)·최무선을 지휘관으로 삼아 왜구를 치도록 했는데 최무선이 화약을 사용해 적의 함선을 모두 불태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왜구들은 배를 잃어버려 바다로 나갈 수 없게 되자 경상도 상주·구미, 충청도 옥천 등 내륙지방으로 들어가 더욱 잔인한 약탈과 살상을 자행했다.

이에 고려정부는 이성계를 최고 지휘관으로 삼아 쳐부수도록 했다. 왜구는 경상도 상주·선산·경산부(지금의 星州) 등을 차례로 노략질하고 지리산 근방의 사근내역(沙斤乃驛 : 함양)에 집결하고 있었다. 이성계는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쪽의 정산봉(鼎山峰)으로 나아가 이지란(李之蘭)과 더불어 악전고투한 결과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이 싸움에서 고려는 왜구의 말 1,600여 필을 얻고 기타 무기도 많이 노획했는데, 이를 황산대첩이라고 한다. 이때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1577년(선조 10) 전라남도 남원시 운봉면 화수리에 황산대첩비를 세웠다.

황산대첩의 승리는 아군보다 10배나 많은 왜적을 격퇴했다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 큰 승리였다. 왜적은 겨우 70여 명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했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이라고 하는데, 이성계의 황산대첩은 최영의 홍산대첩(鴻山大捷)과 함께 왜구 토벌의 일대 전기를 마련한 중요한 전투였다. 이제 이성계는 중앙 정계에도 그 이름을 부각시키면서 새로운 지도자의 길로 한 걸음 더 전진할 수 있게 되었다.

《홍재전서》 중 이지란의 치제문에서는 “씩씩한 청해백이여(桓桓靑海), 개국의 원훈이었으니(開國元勳), 활쏘기는 칠찰(七札:일곱 층의 갑옷비늘)을 꿰뚫는 기량이었고(射穿七札), 용기는 삼군을 빼앗을 정도였네(勇奪三軍). … 지난해에 사당을 수리한 것은(向歲修葺), 경의 공을 가상히 여긴 뜻이었네(曰嘉乃功). 나의 행차가 지나는 길에 티끌이 맑으니(輦路塵淸), 그 자태 헌걸차고 뛰어나다네(颯爽英風).”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