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다리 혹은 줄타기의 절묘한 성공
양다리 혹은 줄타기의 절묘한 성공
  • 박재연 기자
  • 승인 2013.07.15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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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스칼렛 핌퍼넬’

영화 ‘아이언맨’의 주인공 ‘토니 스타크’가 프랑스혁명 이후 공포정치 시대에 태어났다면?
뮤지컬 ‘스칼렛 핌퍼넬’중 영국귀족 ‘퍼시’가 됐을 법하다. 낮에는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한량 귀족이나 밤에는 정의를 수호하는 용감무쌍한 영웅으로 이중생활을 즐기는 모습이 닮았기 때문이다. 물론 스타크가 ‘아이언맨’ 1편에서 자신이 영웅이라며 ‘커밍아웃’ 하는데 반해, 퍼시는 자신의 아내 ‘마그리트’를 위해 정체를 끝까지 숨기려 하는 등 차이는 있다. 그러나 능청스런 영웅 캐릭터라는 점은 매한가지다.
영웅물에서 영웅은 크게 두 부류다. 슈퍼맨·스파이더맨처럼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경우와 배트맨·아이언맨처럼 자신의 부와 권력 등을 이용해 후천적으로 영웅이 된 경우다. 퍼시는 후자다.
프랑스혁명에 이은 뜨거운 기운이 세상에 퍼지기도 전 로베스 피에르(1757~1794)의 공포정치로 죄 없는 사람들까지 단두대의 칼날에 목숨을 잃자 퍼시는 영국인임에도 프랑스 혁명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비밀결사대를 조직한다. 스칼렛 핌퍼넬은 별봄맞이꽃이라는 뜻을 지닌 퍼시의 가명이다.
뮤지컬은 프랑스의 선진 패션을 배우러 간다는 거짓말 등을 통해 생각 없는 귀족으로 치장을 하고, 그 뒤에는 민중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친구들과 계략을 짜 그들을 구원하려는 퍼시의 모습을 적절히 직조한다.
‘스칼렛 핌퍼넬’은 기존의 영웅물을 답습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은 영웅물의 원조 격에 해당한다는 작품이다. 헝가리 출신 영국 소설가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1865~1947)가 1903년 발표한 동명 소설이 바탕이다.
‘조로’,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슈퍼맨’ 등 수 많은 히어로들의 원류로 통하는 캐릭터로 영미권에서는 수차례 영화와 TV드라마의 소재로 사용됐으며 연극으로도 옮겨져 2000회 이상 공연했다. 뮤지컬은 1997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했으며 한국에서는 이번에 첫선을 보인다.
이 뮤지컬에서 또 유심히 봐야 할 부분은 최근 한국 뮤지컬계에 불고 있는 프랑스혁명 바람이다. 공교롭게도 ‘스칼렛 핌퍼넬’을 비롯해 뮤지컬 ‘레 미제라블’ ‘몬테크리스토’ ‘두 도시 이야기’ 등 성황리에 공연 중인 뮤지컬 모두 프랑스혁명을 직간접적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스칼렛 핌퍼넬’은 이들 작품과 궤를 달리한다. 다른 세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에는 내내 비장함이 서려 있다. ‘스칼렛 핌퍼넬’은 시대적 분위기 탓에 비장함을 풍기되 전반적으로 유쾌하다. 이런 부분이 신선감을 안긴다. 프랑스혁명과 영웅이라는 뮤지컬의 클리셰에 빠질 수도 있는 위험을 이렇게 비껴나간다.
다만, 1막에서 캐릭터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에서 대사가 많아 늘어지는 면이 있어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2막에서는 극 전개가 빨라지며 이런 부분이 상쇄된다. 퍼시의 대사는 애드리브를 분간 못할 정도로 유머가 많은데 극이 다소 가벼워질 여지가 있으므로 못마땅하게 여기는 관객들도 있겠다.
‘지킬 앤 하이드’ ‘몬테크리스토’ ‘황태자 루돌프’ 등으로 한국에서 마니아층을 구축 중인 미국의 뮤지컬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54)의 작품이라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그녀가 거기 있었네(She was there)’, ‘당신을 볼 때(When I look at you)’ 등의 넘버가 귓가를 감도나 익히 알려진 와일드혼의 곡들보다는 중독성이 덜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한국형 발라드’ 같은 느낌을 물씬 풍기는 와일드혼 곡들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반갑다.
배우들 중 단연 돋보이는 이는 핌퍼넬를 맡은 박건형(36)이다. 2011년 한국에 첫선을 보인 뮤지컬 ‘조로’를 통해 이미 능청스런 영웅 캐릭터를 연기한 박건형은 핌퍼넬과 가장 닮은 배우로 일찌감치 제작진의 선택을 받았다. 기대에 부응하듯 유머와 진지함을 오가며 최적의 캐스팅이라는 점을 입증한다.
핌퍼넬 역에는 박건형과 함께 박광현(36), 한지상(31)이 트리플캐스팅됐다. 창작뮤지컬 ‘살짜기 옵서예’로 주목 받은 김선영(39)과 그룹 ‘SES’ 출신 최성희(33·바다)가 아름다운 심성과 외모를 지녔지만 한번의 실수로 첩자라는 오해를 받게 되는 여인 ‘마그리트’를 번갈아 연기한다. 핌퍼넬과 강렬한 카리스마로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그의 목숨을 노리는 공포정치 권력자 ‘쇼블랭’은 양준모(33)와 에녹(33)이 나눠 맡는다.
9월8일까지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볼 수 있다. ‘지킬 앤 하이드’ ‘조로’ 등을 통해 지한파 연출가로 자리잡은 데이비드 스완, 구소영 음악 슈퍼바이저, ‘조로’의 작사가 박찬휘, 드라마투르기 한아름, 무대디자인 정승호씨 등 내로라하는 스태프들이 뭉쳤다. 5만~13만원. CJ E&M 공연사업부문. 02-371-9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