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단의 큰별 ‘土地’ 박경리
한국문단의 큰별 ‘土地’ 박경리
  • 신아일보
  • 승인 2008.05.07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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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국문학의 최정상에 우뚝 서 있던 위대한 문학가 한 분을 다른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슬픔은 겪었다.
그의 82년 생애는 고스란히 한국 현대사의 발자취와 문학적 성취가 그러했고 생명 사상으로 일궈낸 사색과 고뇌의 결과가 또한 그러하다. 이제 한국 문학의 대하로 기록된다.
박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 공간과 6.25의 혼란기에 청년기를 보냈고, 그 후로도 오랜 세월 엄혹한 군부정권 아래서 민족사의 동통을 남달리 아파한 한 시대의 지성이었다.
그래서 그가 남긴 작품 속 등장 인물들은 시대의 격랑에 휩쓸려 이리저리 부딪치면서 한을 쌓아간다. 하지만 그 바탕에서 작가가 찾은 것은 ‘불행’이 아니었다.
시대 상황으로도 겪지 못하는 올곧은 저항정신이요, 생명에 대한 외경이요, 인간의 근원적인 사랑과 욕망이었다.
6.25를 배경으로 한 초기의 화재 작 ‘시장과 전장’ 19세기 말에서 광복까지를 다룬 대표작 ‘토지’가 모두 그러했다.
특히 토지가 한국 문학사에 남긴 업적은 어떠한 찬사로도 부족하다하겠다. 구미문학 이론을 따르지 않은 특유한 전개, 등장인물 700여명 하나 하나가 생생하게 살아나게 묘사한 한국 문학에 금자탑이었다.
토지는 그의 생명 사상의 시발이기도 했다. 토지의 사람들은 이 땅의 산천과 다르지 않았다. 26년 동안 ‘토지’를 쓰면서 박경리는 사유의 폭을 인간과 환경·생명으로 넓혀 나갔다.
그에게는 자연의 파괴와 황폐가 우리 모든 생명체의 파괴요 황폐였으며 우리의 유산과 영혼이 자연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생전의 박경리는 인간과 자연과 우주가 함께 어우러지는 이런 생명 관을 피력하고 이를 실천으로 옮겼다. 그가 청계천 복원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제기한 것도 그런 것이다.
2002년 1월 박경리는 아스팔트 속에 갇혀 있던 청계천을 되살리자는 꿈같은 이야기로 명소가 된 사실도 우리는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이제 선생의 육필 원고를 더 이상 볼 수없게 되었지만 선생의 치열한 창작 혼과 생명·사랑이 이 땅에 계속 이어지리라고 우리는 믿는다.
그가 남긴 ‘토지 문학관’ 만으로도 후배들을 위한 창작 교실이자 환경 생태를 사랑하는 이들의 모임터 구실을 할 것이다.
그토록 사랑하던 생명의 흙 이제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련다.
박경리 선생은그의 작품 이름처럼 토지로 돌아가 더욱 굳건한 뿌리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