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단에 새 이정표 세우다
한국 문단에 새 이정표 세우다
  • 신아일보
  • 승인 2008.05.06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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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태 건 / 편집국 부국장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간 ‘土地’의 박경리 선생

“버리고 갈 것만 남아 홀가분”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고 박경리 선생(사진)의 마지막 남긴 습작시에서 그는 무슨 예감이라도 지핀 것일까. 생의 마지막 시 ‘옛날의 그 집’에선 떠남을 내비쳤다.
한국 문단의 큰 별인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씨가 지난 5일 오후 서울 아산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82세로 영면한 소설가 박경리 선생은 대한민국 최고의 소설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이다.
1927년 10월 28일 경남 통영 명정골에서 태어났고 1946년 19살에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군청 공무원이었던 김행도씨와 결혼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 남편과 아들을 잇따라 잃고 외동딸 영주씨를 홀로 키우게 된다.
1950년 23세의 나이로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하였고, 1955년 8월 소설가 김동리에 의해 ‘현대문학’에 단편소설 ‘계산’이 추천되어 소설가로 입문했다. 이후 ‘김약국의 딸들’ ‘파시’ ‘시장과 전장’ 등을 발표하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류소설가로 이름을 떨쳤다.
대표작인 토지는 1969년 현대문학에 1부를 연재하기 시작하여, 1994년 8월 집필 25년 만에 전 5부를 탈고하는 집념을 보였다.
박경리 선생은 1957년 현대문학 신인상, 1965년 한국여류문학상, 1972년 월탄문학상, 1991년 인촌상등과 1999년에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에서 주최한 20세기를 빛낸 예술인(문학)을 받으면서, 대한민국 최고의 소설가로 꼽히고 있다.
사위로 시인 김지하씨가 있으며, 최근 고향에 대한 향수가 깊어져 지난해 마지막 생일을 손자들을 데리고 고향에서 지내기도 했다.
故 박경리선생은 한마디로 인간을 이야기한 작가다. 모든 작품을 인간(생명)에서 출발했고, 작품 안에서 인간의 본질을 탐구했다. 더 넓게는 인류까지도 탐구의 대상이 됐다.
박경리 선생이 인간을 이야기한 작가로 평가되는 것은 그의 삶이 사람의 가장 깊은 고통까지 닿아있기 때문이다.
박경리 선생은 등단 초기 주로 개인적인 삶과 밀착된 단편들을 써냈다.
△불신시대(1957)에서는 죽은 아들을 추억했고, △표류도(1959)는 실종된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암흑시대(1958)는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어린 두 남매와 노모를 부양하는 여주인공 순영이 문학을 통해 상처를 달래는 내용으로 작가 자신의 모습이 직접적으로 투영돼 있다.
1960년대부터는 개인의 비극과 아픔을 달래는 문학에서 벗어나 사회와 세계를 인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김약국의 딸들(1962)과 △시장과 전장(1964)이 대표적이다.
△김약국의 딸들은 19세기 중후반부터 1930년대까지 선생의 고향 통영 일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김약국의 다섯 딸과 그의 아내 한실댁을 중심으로 인간의 근원적인 충동과 욕망이 빚어내는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한국전쟁을 정면으로 다룬 소설인 △‘시장과 전장’은 이념을 위한 전쟁 속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개인의 비애를 담았다. 생존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여주인공 남지영은 저자 자신을, 이념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하기훈은 남편의 모습을 녹아내기도 했다.
1969년에는 대작 토지 집필에 들어간다.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 ‘문학사상’(1972) ‘주부생활’(1977)등 7개 매체를 거쳐 25년 만에 5부 21권으로 완성해 낸다.
그동안 박선생은 세상과 단절한 채 초인적인 집념으로 글쓰기에 몰두했다.
당시 문단에서는 토지 집필을 ‘생명을 건 사투’라고 부르기도 했다.
1971년 9월 유방암 수술을 하고 보름 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 원고를 썼다.
그는 당시의 심정을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에도 없었고,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주술(呪術)에 걸린 죄인인가. 내게서 삶과 문학은 밀착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징그러운 쌍두아(雙頭兒)였더란 말인가”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토지’ 완간 이후에는 간간이 산문을 기고하고 시집을 출간하는 것 외에는 작품 활동은 최소화한 채 토지문화관 건립과 환경에 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2003년 현대문학에 장편 ‘나비야 청산가자’를 연재하기도 했으나 세 차례만 실은 채 미완으로 남겨졌다. 올 들어서는 현대문학 4월호에 ‘까치 설’‘어머니’‘옛날의 그 집’등 신작시 3편을 발표하며 마지막까지 창작 의욕을 보였다.
이처럼 그동안 그가 집필한 작품은 이 땅의 사람과 자연을 사랑했으며 생명 하나 하나의 존엄성이 존중돼야 한다는 생명 사상이 박씨의 작품 속에서 엿보인다.
한국 문학의 거성이셨던 박경리 선생은 가셨지만, 대한민국의 모든 이는 당신을 기억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