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연 충 부산지방 국토관리청장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최근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읽으면서 다시 떠올려보게 되었다.
김훈은 370년전에 이 땅의 신민(臣民)들이 죽지 못해 견뎌내야 했던 그 혹독했던 겨울을 특유의 명료하고 예리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새로이 대륙의 지배자로 떠오른 청나라 이십만 대군의 침공, 대세를 읽지 못하고 명분에만 집착하다가 황망히 남한산성으로 쫓겨 들어간 조선의 군신, 아무런 대항수단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염없이 되풀이되는 공허한 갑론을박, 그 와중에 무력하게 떠밀려갈 수밖에 없는 애꿎은 민초들의 고초까지… 작가가 상상으로 풀어내고 있는 당시의 정황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병자호란 내내 대청관계를 어떻게 개념지을 것인지를 두고 대립했던 김상헌과 최명길·학창시절에 공부했던 국사 교과서는 대체로 김상헌을 비롯한 삼학사(三學士)를 충절의 표상으로 평가한 반면, 화친을 주장했던 최명길은 나약하고 사대적인 인물로 기술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이(利)’보다는 ‘의(義)’를 중시했던 유교적 가치관의 영향 때문이었으리라. 그런데, 과연 그 시대와 인물을 그렇게 바라보는 것이 타당한가?
욱일승천하는 청의 이십만 대군이 강토를 쑥밭으로 만들면서 시시각각 조여오고 있는데, 군신이 모두 좁은 산성에 갇힌채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백성들과 불과 수천의 군사로 무엇을 어떻게 해볼 수 있었겠는가.
처한 현실이 그러했음에도,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지 못하고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을 바엔 차라리 나라가 망하는 게 낫다는 식의 무모한 명분론은 책임 있는 자세로 보기 어렵다.
그보다는 한때의 굴욕을 감수하고서라도 난관을 수습하여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살핀 연후에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가 아닐까.
‘의’와 ‘충’을 내세운 끝에 왕조가 끊기고 백성이 도륙되는 결과가 빚어진다면 더 높은 가치인 ‘위민’의 덕은 실종될 수 밖에 없다.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냉철한 시대인식이 필요하리라는 점을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역사 얘기가 나온 김에 한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요즘들어 안방극장에서는 사극이 부쩍 인기를 끌고 있다.
‘주몽’에 이어 ‘대조영’과 ‘연개소문’의 영웅담이 시청자를 사로잡더니, 이번엔 ‘대왕세종’과 ‘이산’이 맞대결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성군(聖君) 세종대왕과 조선 후기의 개혁군주인 정조대왕을 다루고 있는데, 이들 두 분이 우리 역사에서 차지하는 상징성이 지대하고 어린 학생들에게 미칠 교육적 효과도 큰 만큼 스토리전개에 있어서도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리라 본다.
극적인 흥미를 위해서 얼마간의 상상을 가미하는 건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도를 넘어서는 수준이라면 곤란하다.
대군이 저잣거리에서 무뢰배에게 무방비로 봉변을 당하는가 하면 때로는 홍길동 식의 활극을 펼치기도 한다.
중전이 한밤중에 사복을 입고 궐 밖의 사가에 나와 같은 파당의 조정 중신들에게 투쟁전략(?)을 지시하는 장면은 뒷골목 조폭세계를 보는 듯하다.
‘왕과 나’에서는 내시부가 조정 중신들의 동향은 물론이고 최고 감찰기관인 사헌부의 비리까지 뒷조사할 정도의 힘을 가진 것으로 그려졌었는데,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우리는 역사를 이해하면서 국가관을 형성하게 된다.
그런 만큼 역사는 무엇보다도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 엄격한 고증은 기본이다.
우리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을 규탄하고, 중국의 허황된 동북공정을 경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객관적인 사실을 의도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물며 역사를 재밋거리 삼아 가벼이 다루는 것은 경계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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