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혜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슬퍼하는 백성은 없었다
충혜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슬퍼하는 백성은 없었다
  • 황미숙
  • 승인 2013.06.24 15: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60. 고려 제 28대 충혜왕(忠惠王)

충혜왕(忠惠王, 1315∼1344)은 고려 제28대 왕으로 재위 1330∼1332, 복위 1339∼134, 이름은 정(禎), 몽고식 이름은 보탑실리(普塔失里). 충숙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명덕태후 홍씨(明德太后洪氏)이다.
1328년 세자로 원나라에 갔다가 1330년에 충숙왕의 전위(傳位)를 받고 귀국해 즉위했다. 1332년 원나라에 의해 전왕인 충숙왕이 복위했으므로 다시 원나라로 갔다.
1339년 충숙왕이 죽자, 심양왕 고(瀋陽王暠)를 옹립하려는 조적 등이 음모를 꾸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충혜왕이 복위했다. 그는 본성이 호협방탕해 주색과 사냥을 일삼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후궁만도 100여명에 이를 정도였다. 기거주(起居注) 이담(李湛)의 충고와 전 군부판서(前軍簿判書) 이조년(李兆年)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방탕한 습성을 버리지 못해 유신들과 반목이 심했다.
그는 관제를 개혁해 과거의 고시관(考試官)을 다시 지공거(知貢擧)로, 정승을 중찬(中贊), 평리를 참리(參理)로 고쳤다.
1331년에는 종래의 은병(銀甁) 통용을 금하고 한개가 오종포(五綜布) 15필에 해당하는 소은병(小銀甁)을 통용하게 했다. 그리고 원나라에게 쌍성(雙城: 지금의 영흥)·여진·요양(遼陽)·심양(瀋陽) 등지에 유입한 고려인의 쇄환(刷還)을 요청했다. 그해 이학도감(吏學都監)을 설치했으며, 5도에는 염장도감(鹽場都監)을 설치했다가 얼마 뒤에 폐지했다. 1342년에는 식화(殖貨)에 힘써 의성창(義城倉)·덕천창(德泉倉)·보흥창(寶興倉)의 포 4만8000필을 풀어 시장에 전포를 열게 했다.
1343년 3월의 어느 날 밤에는 민천사 누각에 올라 비둘기를 잡으려다가 횃불이 옮겨 붙어 누각을 태운 일이 있고, 그 다음 날에는 연회장을 만들기 위해 민가 1백여 채를 철거하고 토지와 재산을 강탈하기도 했다. 또한 그해 4월에는 개경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데,
“개경 사람들 사이에 근거 없는 소문이 유포되기를 왕이 민가의 어린아이 수십 명을 잡아다가 새로 짓는 대궐의 주춧돌 밑에 파묻으려 한다고 했기에 집집마다 놀라 어린아이들을 안고 도망치는 자가 있었으며, 못된 소년들이 이 틈을 타서 마음대로 강탈하고 절취했다.” 충혜왕은 새로운 궁궐을 짓기로 하고 백성들을 강제부역에 동원해 민생을 어지럽게 했다. 그는 직접 공사장 담장에 올라가 감독을 했으며, 궁궐이 준공되자 각 도에서 칠을 거둬들여 단청을 했다. 이 때 단청의 안료를 수송하는 데 기한을 늦추면 그 벌로 몇 곱의 값에 해당하는 베를 징수했다.
충혜왕의 학정이 계속되자 이를 참지 못한 현효도가 왕에게 독약을 먹이려다 실패해 사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기철 등은 원나라 조정에 고해 충혜왕의 폐정이 극에 달했다며 그를 소환해 폐위시킬 것을 건의했다.
충혜왕의 악행을 보고받은 원나라 조정은 협의 끝에 그를 소환하기로 결정하고 원으로 압송된 충혜왕은 원나라 조정의 결정에 따라 게양현으로 유배되고 있었다. 그의 유배에 앞서 내려진 순제의 유고 내용은 “그대 왕정은 남의 윗사람으로서 백성들의 고혈을 긁어먹은 것이 너무 심했으니 비록 그대의 피를 온 천하의 개에게 먹인다 해도 오히려 부족하다.
그러나 내가 사람 죽이기를 즐겨하지 않기 때문에 게양으로 귀양 보내는 것이니 그대는 나를 원망하지 말라.” 게양은 연경에서 2만여 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충혜왕은 이곳을 향해 가던 중 악양현에서 1344년 정월 30세를 일기로 죽었는데, 독살된 것으로 보인다. 충혜왕의 시신은 1344년 6월에 개경에 도착했고, 그해 8월에 영릉에 장사 지냈다.
《맹자》 만장편에서 “집대성했다는 것은 금속소리에다가 옥소리를 떨쳐낸 것이다(集大成也者金聲而玉振之也). 조리 있게 시작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하는 일이고(始條理者智之事也), 옥소리를 떨쳐낸다는 것은 성덕을 지닌 사람이 하는 일이다(終條理者聖之事也).”라고 했다. 지혜로움을 갖고 성덕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자신은 그러하지 못하면서도 다른 이들에게는 하지 못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나 또한 다를 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