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유혈시위사태
‘티베트’ 유혈시위사태
  • 신아일보
  • 승인 2008.03.26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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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충 / 부산지방국토관리청장
“시시각각 다가오는 중화의 물결에 맞서 정체성을 지키고 종족을 보전하려는 티베트인들의 절절한 호소, 이를 용납치 않으려는 중국의 강경진압에 무기력하게 내몰려있는 티베트, 茶馬古道를 오가며 순박한 삶을 살아가던 티베트인들에게 언제쯤 평화와 안식이 찾아들 것인지 안타깝다”

티베트 유혈시위사태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사망자 수가 최소한 100여명에 이른 것으로 추측되고 있지만, 중국 당국이 언론보도를 철저히 통제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현지실상은 훨씬 심각한 상태가 아닐까 짐작된다.
티베트 정신세계의 발원지인 조캉사원에 피신해 있는 시위 주도자들을 검거하기위해 중국 당국이 이곳에 공권력을 투입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전해지고 있어 라싸 일원에는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고 한다. 티베트는 어떤 곳이고 이번 티베트사태의 본질은 무엇인가?
통상 티베트인이라면 오늘날 중국이 藏族이라 부르고 있는 민족을 말하며, 티베트는 중국의 행정구역상 西藏自治區(면적 122만㎢)를 일컫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원래의 티베트는 藏族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靑藏高原 일대의 더 넓은 영역에 걸쳐있었다. 이들은 옛부터 底 또는 羌이라 불리며 유목생활을 해왔지만 7세기 초에 손챈캄포라는 불세출의 영걸이 나타나 비로소 통일국가를 이룬다. 이후 독자적인 왕조를 유지해오다가 1253년 元나라 憲宗의 무력침공을 받으면서부터 중국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된다.
중국은 이를 근거로 티베트를 元代이래 중국의 영토였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淸代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티베트는 엄연히 독립정부를 유지해왔다. 이 평화로운 땅을 1950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침공하여 무력으로 복속시키면서 티베트의 비극이 시작된다. 1959년 대규모 봉기때에는 8만7천여명의 티베트인들이 사망했고, 뒤이어 문화 혁명을 거치면서 6000여개에 달했던 불교사원 대부분이 파괴되고 무려 36만명의 승려가 사망하거나 강제 환속되어 전통과 사회체제 자체가 붕괴되기에 이른다.
최근 들어서도 2006년 靑藏鐵道 개통을 계기로 전반적으로 中國化가 가속화되고 漢族의 이주도 계속 늘어나면서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이 막대한 희생과 국제사회의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티베트에 집착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여러가지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그 근저에는 민족문제가 자리잡고 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중국은 漢族 이외에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이다. 비록 겉으로 보기엔 공산당 지배 하에 일사불란한 사회체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소수민족들의 분리 독립 불씨는 언제라도 점화될 여지가 있으며 이는 중국 당국이 가장 염려하는 아킬레스건이다.
특히 인구 540만명인 티베트가 떨어져나갈 경우 그보다 인구도 많고 한족과는 문화와 전통이 전혀 다른 회족(980만), 위구르족(840만), 몽고족(580만)들도 들썩이게 될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들 소수민족 자치 지역에 끊임없이 한족을 이주시키고 이른바 동북공정과 서남공정을 통해 동북아의 역사를 통째로 中國史에 편입시키려는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북경올림픽이 코앞에 다가온 시점이라 중국정부로서도 마냥 강경책으로 일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티베트 문제에 관한 한 중국정부의 입장은 단호하다.
최악의 경우 올림픽 개최가 흔들리고 비인권적인 처사에 대한 온갖 비난에 맞닥뜨린다 할지라도 중국이 티베트의 독립을 허용할 리는 만무하다.
달라이라마측과 대화에 나서 자치권을 다소 강화해주는 정도의 타협을 모색할 수는 있겠지만, 여타 자치구의 눈치도 보아야 하는 만큼 그것조차도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이미 무시할 수 없는 大國으로 커버린 중국에 대해 무력진압을 자제하고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는 어쩐지 공허해 보인다.